[글] 이젠 들켜도 상관없는
서울문화재단
웹진 연극인 237호
기획_저항의 각자
이젠 들켜도 상관없는
https://www.sfac.or.kr/theater/WZ020300/webzine_view.do?wtIdx=13144&pageIndex=1
어디까지 꺼내어 말할까. 최대한 삼삼하고 슴슴하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길고 긴 작전 중 하나였는데 저항에 대한 원고 요청을 받으니 ‘뭐지? 들켰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혹은 몇 년 동안 연마한 평온함의 끄트머리에서 나의 분노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어 누군가에게 포착된 건 아닌가, 다시 잡초를 뽑으며 수행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닌가 돌아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내가 활동하는 문화예술계, 그 배경이 되는 ‘사회’라는 거대한 세계에 대해 희망과 더불어 분노를 안고 살던 시기가 꽤 길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변할 수가 없는 것인지 화를 누르고 다른 방안을 차분히 정리해 공식적인 자리에 가도 그 발언이 여러 이유로 힘을 발휘할 수 없음을 경험했다. 정책의 변화를 위해서는 공공기관 중심의 전문 연구를 통해 구체적 언어를 남겨야 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해보지 않던 연구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변화에 집중하던 나에게 누구도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활동이자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그 순간 나의 순진함을 반성하며 더욱 치열하게 현실의 사안들을 공부했어야 했을까.
하지만 몇 년 전 시골 같은 소도시로 거주지를 옮긴 후 사람보다 풀을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인간에 대한 나의 막연한 신뢰가 문제였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떤 시스템을 만들면, 어떤 선언을 하면, 어떤 사업을 기획하면 ‘사람들’이 다르게 인식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단순하지도 유연하지도 지혜롭지도 이타적이지도 않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에 관심과 돈과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낯선 이야기는 두려워한다. 성과를 내기 어려운 미련한 행동에 동참하는 것은 망설인다. 날 선 이슈에 대한 길고 긴 설명이나 논의들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논의들을 정책화하는 과정을 논리적, 합리적으로 이끌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모두 바쁘고 외롭고 힘들다. 나 역시 그 사람들 안에 있다.
내가 그 흔들리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서, 역시 바쁘고 외롭고 힘든 사람들에게 연구보고서를 들이밀고 설득을 하고 메일을 보내고 다른 것도 해보자고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러하다. 단지, 이제는 그런 상태 안에서 나의 활동 혹은 저항 같은 무언가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건조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희망도 의지도 없다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이젠 목표가 다르다.
저항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목표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나도 함정에 빠졌었다. 저항의 목표가 가질 수 있는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이런 사안에서는 이런 해결, 저런 사안에서는 저런 비판. 그런 공식이 분명하니 해결되지도 변화되지도 않는 사회 속 ‘사람들’이 마냥 문제로 보였다. 어떤 날은 누군가를 향한 강한 미움을 안고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 미움이 분노가 되어 나를 삼키면 다음 활동의 동력을 찾기 어려워지는 데도 말이다. 내가 그렇게 나를 좁은 구석으로 밀어 넣어 혼자 지쳐 떨어져 나갈 것이란 걸 누군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그러니 이젠 다른 목표가 필요하다. 저항의 목표를 각자가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덜 외롭게 갈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저항하기가 좀 낯선 모습일지라도, 이젠 이슈 단위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역할 자체가 아니라 나의 삶 전반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내 식으로 저항해야 내가 그 안에 살아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도 정의롭고 명확한 저항의 모습을 계속 보여주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무 첨예한 논쟁에서는 뒤에 숨고 싶다. 나보다 세 보이는 사람의 말을 애써 반박하기에 겁이 난다. 나의 논리가 부족할 때는 다른 장치들로 상황을 모면하고 싶다. 내 마음이 힘든 시기엔 누군가의 불평등을 외면하고 싶다. 여기저기에서 들은 좋은 말들이 스스로에게 버거운 순간도 많다. 그런 날은 그냥 집에 가서 강아지들이나 끌어 안고 예쁜 잔에 커피나 마시고 싶다.
중요한 것은 이런 나약하고 일상이 바쁘고 평온함이 일정하지 않은 존재들, 결국 ‘사람들’이 무언가를 향한 저항‘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항의 기운과 밀도를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다. 세상에 부조리와 불합리가 넘쳐나니 모두가 여러 이슈들을 향해 저항의 에너지를 몰아붙여도 부족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안 되는 일들이 많은 것이다. 당연하게. 그리고 뭔가 된 것 같아도 금방 도루묵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걸 여러모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들’의 저항은 계속된다. 저항의 자리에서 외로움을 달래든 대의를 이루든 관계를 도모하든 자기 정치를 하든 어쨌든. 그 과정에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실망하고 지치고 화가 나고 서로에게 상처를 받는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이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은 그 ‘사람들’을 나의 삶으로 초대할 수 있는 여유를 유지하는 것, 그것을 거대한 세상을 향한 저항의 목표로 두고 있다. 굳이 저항이라고 의미화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살아도 되겠다 싶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나의 감정이나 언어의 자리에 누군가를 초대했던 것 같다. 그것은 결국 동조, 동의, 세력화를 목적으로만 작동했고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에 혼자 부정적 의미를 쌓아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의 삶에서 선택하게 되는 저항의 방향이나 방법을 나도 좀 궁금해할 수 있는 여유를 유지하려고 한다. 내가 더 넓어질 때 그 자리에서 누군가도 지금의 심정을 꺼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그 순간을 기억하며 각자의 힘으로 무언가를 또 쌓아볼지 모른다.
몇 년 전에는 만만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안 하던 네일아트도 열심히 했었다.
요즘은 지역으로 이주한 후 잡초를 뽑으며 다른 힘을 기르고 있다.(필자 제공)
하지만 우리가 공들여 쌓은 탑은 계속 무너질 것이다. 애초에 같은 탑을 쌓고 있던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탑 쌓기가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아마도 내가 나서서 그럴 것이다. 나는 탑이 계속 무너지는 게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그래서 덜 지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탑을 쌓다 말고 딴짓을 하거나 탑이 무너지는 리듬에 맞춰 노래를 만들거나 탑을 열심히 쌓는 나를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누군가에게 포즈를 취하는 여유도 찾았다. 성사되기 어려운 일에 미련함을 발휘하는 것이 심지어 살아냄의 재미라고 주장하며.
이런 비효율적이고 모호한 저항하기를 이제 어쩔 건가. (난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딱히 대응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좀 신경은 쓰이지 않는가. 왜냐면 난 계속 이렇게 살아갈 거니까. 최소한 비키진 않을 테니까. 어느 날 하나의 이슈가 어떻게 마무리되든 상관없이 여기서 무너지는 탑을 배경으로 나의 포즈를 취할 것이다. 누군가 내 다음 포즈가 궁금해지면 그 배경도 맥락도 궁금해질지 모르지. 그것이 은근한 저항의 기운을 만들어낼지도 모르고 또 실패하기도 하겠지. 그건 이젠 중요하지 않다. 목표 설정의 비장함을 덜어낸 자리엔 계속 살아가 보고 싶은 설렘마저 초대되었으니.
최선영
문화예술기획자. 2007년에 시각예술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현재는 문화예술 관련 기획, 연구 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개인 창작보다는 공공성 기반의 공동 작업을 주로 하고 있으며 3년 전 수도권에서 충남 지역으로 이주하여 활동 범위를 모색 중이다.
홈페이지 : https://uugoorichoi.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