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글] 정확한 욕망이 필요한 때

문화예술기획 최선영 2023. 12. 21. 14:01

지역문화진흥원
신문화권 발굴 프로젝트 <문화지대> 지원사업
결과자료집 원고




정확한 욕망이 필요한 때



최선영 / 문화예술기획자

큰 미션이 현장에 떨어졌다. 신문화권을 발굴하라. 유사한 특성을 가진 지역 간 공동의 문화자원을 기반으로 기획된 지역 연계형 문화콘텐츠를 발굴 및 교류, 협력하며 기존에 운영되던 ‘문화가 있는 날’ 프로그램도 기획, 운영하라. 예산 규모는 컸다. 사업 규모도 당연히 컸기에 지역문화진흥원(진흥원)도 지역 현장도 ‘이번에 해볼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꿈 꿨으리라. 그동안 진흥원이 ‘문화가 있는 날’ 연계 사업이나 개별 지역에서 시도된 지역 프로그램과는 다른 무언가. 여러 지역의 기획 주체들이 협력하여 새로운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기회. 그래서 이 사업은 올해 새롭게 운영된 시범사업의 의미가 컸다.

하지만 시범적이라고 하기에 사업 규모는 상당히 컸고 목표하는 내용도 다소 거시적이었다. 새로운 실험을 하기에 판이 좀 크게 짜여진 상황이었다. 그러니 초반부터 사업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진흥원도 익숙하지 않은 그림을 청사진으로 그려내야 했고 지역 현장도 매달 작지 않은 행사를 치러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필자를 포함한 서너명의 컨설턴트가 이쪽의 청사진과 저쪽의 부담감을 관찰, 해석하며 역시나 시범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국의 여러 문화예술 지원사업 혹은 제도가 이런 흐름과 상황들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에 비슷한 무언가가 자리를 잡거나 스쳐 지나간다. 그런 흘러감을 주도하는 주체를 명확하게 구분해내기는 어렵다. 급하게 시행되는 사업과 사업 사이로 여러 사람들의 욕망과 욕구와 어려움이 작동한다. 어떤 때에는 연구나 자문회의 등의 절차 속에서 사업의 운영 근거가 마련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상위 기관의 요구나 (심지어) 아이디어로 제도의 큰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현장이 결정된 것을 전달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계속되는 사업들 안에서 현장이 보여준 사례, 혹은 보여주지 못하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제도와 정책 설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신문화권 발굴 프로젝트 <문화지대>도 잠시 탄생했던 것이 아닐까.

단지 그동안 진흥원의 여러 사업들이 아무래도 전국 대상의 지역 단위로 이루어지다보니 더욱 큰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그것은 여러 주체들의 욕망(결코 나쁘기만 한 의미가 아닌)이 그려낸 2023년의 그림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함께 만들어낸 공동의 미션이 되었다. 이것도 해내고 저것도 해내면 좋을. 그렇기에 <문화재단>의 사업 공고문에 적힌 사업의 방향성은 여러 구석으로 향하는 욕망을 모두 담아내려는 또 다른 욕망처럼 읽힌다. 지역 간 연계, 협력, 프로그램 개발 및 활성화 등등.

그리고 사업이 시작되었다. 서너 지역의 주체들이 협력한 총 두 개의 단체가 선정되었고 바쁘게 한 해를 보냈다. 미션이 많고 넓기 때문에 해내야 하는 것도 작고 좁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속에서. 그리고 진흥원은 시범사업의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프로그램 중심으로 서술해 답변할 수밖에 없는 문서를 현장에 전달했다. 실험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하는 것과 별개로 진짜 실험을 하는 것의 어려움, 서투름은 지속되었다. 사업이 운영되는 일반적인 틀, 속도, 서로에게 말을 걸고 답하는 방식은 변화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내용 중심으로만 실험하기를 서로가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실험을 하기에 적절한 상황이나 규모, 그러기 위한 태도가 먼저 마련될 수 있었다면 ‘문화지대를 발굴해야 한다’는 각오보다 먼저 각자의 정확한 욕망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함께 찾아야 하는 것, 해내야 하는 미션의 덩어리가 낯설고도 거대하니 사실상 각자가 집중했던 관심사나 지역 내 관계, 질문을 처음부터 주장하기가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래서 단체들도 진흥원이 제시했던 ‘문화가 있는 날’의 프로그램 운영 방식을 새롭게 상상하기도 어려웠고 촘촘하고 발빠른 계획으로 매달의 일정을 확정하게 되는 선택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업 중반부 쯤에 진흥원도, 현장도 다시 기획의 방향성을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런 과정은 시범사업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다. ‘사실 무엇에 집중하려고 했던 것일까’라고 서로에게 물어볼 수 있는 기회. 이 질문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사업에 관여된 여러 주체들의) 정확한 욕망’을 묻는 것이기도 했다. 여러 현실적 이유와 문화정책의 흐름상 신문화권을 발굴하자는 구호가 현장에 전달되었지만 ‘사실은’ 무엇을 향한 욕망이 구체적 필요와 함께 제도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했다. 또한 현장에서도 신문화권을 형성한다는 표현이 좀 낯설지만 그 구호 안에서 무엇을 향한 (그동안의) 욕망을 주장해볼 수 있겠다는 ‘솔직한’ 판단도 필요했다. 그 ‘꺼내놓음’이 언어 중심의 회의나 토론으로만 시도되지 않을 수 있는 곳이 문화예술 분야이다. 그래서이기도 하고, 사실 모두 바쁘기도 하여 매달 단체마다의 활동과 ‘문화가 있는 날’ 프로그램을 ‘하면서’ 서로의 욕망과 주장을 꺼내놓게 되었다. 그래서 그 태도나 방식도 매우 구체적으로 서로에게 보였다. 어떤 때에는 욕망이 덜 정확했다는 것이, 어떤 때에는 욕망이 여러 갈래로 흩어지거나 뻗어나가고 있다는 것이, 어떤 때에는 욕망 대신 다른 것을 담아내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진흥원과 단체의 주체들이 서로가 꺼내놓은 것을 경험한 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업의 매우 후반부였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현상이기도 했고 자연스러운 상황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하나씩 뜯어보며 대화를 나누기엔 너무 판이 컸으니까.

그렇다면 이쯤에서 지역의 주민들도 떠올려보자. 그들이 얼마나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했는지 혹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는지를 논의하기 전에, 그들에게는 이 사업에서 어떤 욕망이 읽혔을까. 역시나 이때의 욕망은 결코 이기적이거나 개인적인 차원의 부정적 요소가 아니다. 어떤 사업이든 기관이나 진행 주체의 욕망이 감지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주민을 포함한 사업 참여자들의 만족을 위한 적당한 서비스, 혹은 그들과 연결되지 못하는 패쇄적인 내부 잔치가 된다. 활동의 주체가 뿜어내는 욕망이 지역과 충돌하든 섞이든 평행하든 그것이 등장해야 그 다음의 이야기가 생긴다. 작고 좁더라도 문화지대라는 게 생길수도 있다. 문화적인 지대란, 다양한 것들이 살아있는 상태로서의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문화지대는 궁극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투명하고 솔직한 욕망들이 등장할 수 있는 무대여야 한다. 이 지역의 공간, 저 지역의 콘텐츠를 연결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발견되는 두루뭉술한 의미가 아니라, 이걸 하고 싶어! 저걸 해보겠어! 그건 안돼! 그런 명확한 욕망과 의도가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 자체여야 한다. 하다보면 그려지는 것은 그냥 세상 모든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건 주변부의 서사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관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업이 모두 마무리되어가는 지금 시점에, 우리에게 발굴된 것은 몇 달만에 형성된 문화지대가 아니라 ‘무엇을 더 하고 싶어졌는지’에 대한 강력한 동기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