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보면 읽히겠지

[쓰다 보면 읽히겠지] 03. 미시적인 것으로 깊게 여는 세계

문화예술기획 최선영 2025. 1. 16. 16:05
<쓰다 보면 읽히겠지> 
 
나는 혼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문화, 예술 관련 공공 프로젝트나 사업 기획을 하기도 한다. 창작, 기획, 문화예술교육 등을 주제로 강의나 컨설팅을 하기도 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과 마주 앉아 회의도 많이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나 강아지들과의 산책 길에 여러 생각을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과 상상과 심정을 가로지른다. 나는 그 흐름을 글로 옮겨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 문화예술 분야의 질문이 특정 사업이나 제도, 이슈에 대한 한정된 논의로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의 삶은 여러 차원으로 연결, 교차되기 때문이다. 웹진이나 자료집 원고, 사업 보고서에는 담기 애매하지만 분명하게 떠오르는 현재의 질문을 계속 펼치고 싶다.

 

 


 
쓰다 보면 읽히겠지 03.

"미시적인 것으로 깊게 여는 세계"

 

 
나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동하지만 작품 관람을 그리 많이 하지 않는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예술보다 예술계가 먼저 인식되는 상황에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미대를 다니면서 미술계가 형성, 작동, 지속되는 상황을 더 현실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하나의 전시도 어떤 맥락이나 주제가 아니라 누구의 파워, 욕망, 인맥, 그 사이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먼저 해석되었다. 그건 나에게 괜한 시니컬함도 선사했는데 덕분에 작품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도 스스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저 색이 참 이쁘다, 이 부분을 이렇게도 표현했네, 작품 참 좋다 같은 직관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상도 스스로 낯설어할 정도로.
그래서 작품의 의미나 방식보다 그것이 놓이는 상황, 시의적 맥락에 더 관심이 생긴 것도 있다. 어느 전시에 걸린 작품을 그 자체로 보기보다 그 전시가 어떤 사업이나 예산을 활용해 어떤 과정으로 구현되었는지, 누가 관여되어 있는지, 어떤 언어와 방식으로 외부에 소개되는지, 관람객은 어떤 관심이나 인식을 바탕으로 그것을 보고 있는지 등에 집중한다. 그래서 문화예술 분야의 여러 사업 구조를 읽어내거나 개선 방향을 연구하는 활동도 하고 있다.
그런 시간이 대학 졸업 후 15년쯤 흘렀을 때 생활 환경도 바뀌고 마음에도 좀 여유가 생기니 조금씩 작품의 작은 부분이 끌리기 시작했다. 궁금하지 않았던 클래식 음악도 애써 찾아 듣고 싶어졌다. 그 계기는 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지원사업 현장을 모니터링한 경험 때문이었는데 연습실도 아닌 공간에서 그가 들려준 짧은 연주가 그저 너무 '좋았다'. 바이올린 소리가 이렇게 좋다니. 계속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른 연주자와의 차이도 느껴졌다. 내가 클래식에 대한 전문성은 부족하지만 그 선율은 미묘한 표현들의 촘촘한 결과물로 들렸다. 한 사람이 오랜 시간 어떤 영역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예술의 사회적 개입', '사회적 예술' 등으로도 표현되는 또 다른 활동을 역시 사업 내에서 모니터링한 적이 있었다. 나는 여러 예술가들의 미묘한 표현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 이전에 시의적 의미를 띠고 있는 그 사업을 다층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욕구가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모니터링 현장이 사회적으로 무언가 다른 양상, 의미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예술에 많은 해석과 설명이 왜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오랜만에 했다. 
현장에서 예술가들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을 낭독극으로 풀어내기 위해 막바지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라는 대사가 다 같은 ‘그래’가 되지 않도록, ‘폭발’이 맥락, 호흡, 감정선에 따라 다르게 ‘폭발’하도록, ‘물방울 소리’가 언제 똑! 하고 등장할지 이야기하고 해 보고 다시 맞춰보고 있었다. 그것은 해당 사업이 가지고 있는 거시적 개념, 사회적 의미로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사실 그 순간은 매우 미시적이고 좁은 범위의 무언가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 미시적임이 사실 더욱 예술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그 사업을 어떤 맥락과 기준으로‘만’ 봐야 한다고 스스로 학습했던 것은 아닌지, 그 기준이 너무 사업적, 정책적, 거시적인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더욱 예술과 멀어진 것은 아니었는지 질문도 생겼다. 물방울 소리의 타이밍, 예술가들의 각기 다른 눈빛... 그런 작고 작은 것이 디테일이라고도 불리며 삶이나 사회의 어느 지점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것이 예술일 수 있는데 내가 너무 큰 질문을 틀거리로 현장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후 해당 사업을 통해 여러 현장을 가다 보니 예술가들은 미시적인 것들을 붙들고 고민하거나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예술가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래서 시대적 흐름이나 속도와 어긋나는 순간도 있으나) 그것을 누군가가 얼마나 들여다보려고 했을까 생각도 들었다.
이후 여러 사업 혹은 일상적인 창작의 순간을 보니 예술은 결국 디테일한 것들의 연결 혹은 집합체로 보였다. 그것을 신경 쓸 수 있는 존재, 그래야만 하는 예술가는 어떤 면에서 주변의 상황이나 시대적 흐름까지 고려하기가 벅차기도 하다. 그것은 큰 것을 못 보고 작은 것에만 집착하는 것이라 판단될 수 있으나 그 작은 것은 실제로는 좁고 깊은 영역이다. 그 깊이는 결코 작은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그 깊이가 있어야 '예술적‘이라는 직관적 느낌을 누군가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예술 관련 요소를 한 활동 안에 적당히 배치만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관객 참여형 전시'에서 관객이 입장해서 무언가를 만져보고 던져보고 두드려볼 수 있게 한다 정도의 경험 요소를 배치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예술적이지 않다. 관객이 무언가를 만져보고 싶게 하기 위해 조명이나 공간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떤 안내를 할 것인지, 만지게 되는 오브제나 작품은 어떤 질감, 온도, 무게, 형태, 크기로 어디에 어떻게 놓을 것인지, 그 위치의 높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지 등등 결국 많은 디테일이 필요하다. 그것을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의 고민이 존중받을 수 있는 기획과 준비의 과정도 필요하다. 역시 할 일이 참 많아지는데 그것은 '관객 참여형 전시를 했다'는 사실을 채워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 의미가 쉽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에 힘들지만 말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여러 현장을 보면 무언가를 배치했다는 사실 자체로 예술의 충분조건을 채우려는 현장이 적지 않다. 미묘한 깊이를 궁금해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는 주변적 시선,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을 한다. 너무 거시적인 구조나 맥락만 보려 했던 나와 같은 관점이 그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결국 거시적인 것도 미시적인 것들의 구현을 통해 방향을 틀어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여러 예술가들과 대화를 해보면 실제로 디테일을 이야기할 때 각자의 언어가 나온다. 심지어 눈빛도 달라진다. 당신도 그것이 보이느냐, 진짜 좋지 않냐 그런 눈빛으로 갑자기 말이 많아지는 사람도 있다. 예술의 사회적 개입, 장르 간 협업을 통한 차별성 마련, 융복합 예술의 시대적 의미 같은 표현들 말고 예술가의 진짜 언어를 들을 수 있다. 그 대화는 꽤나 흥미롭다. 어떤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어떤 울림 구조를 고려해야 되는지, 악기의 어느 부분에 어떤 장치를 해서 조금 다른 사운드를 실험하고 있는지, 붓칠의 각도와 속도에 따라 어떻게 다른 표현이 가능한지, 관객이 어떤 각도에서 무대를 봐야 원했던 장면이 구현되는지 등. 나에게도 그런 호기심이 있었는데 왜 여러 일들을 하면서 그것을 더 멀리하게 되었을까.
많은 사업과 프로젝트가 가능해졌다는 것만으로 예술적인 순간이 풍성해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거시적인 주제를 구현해내는 데에 여러 사람의 에너지가 집중되면 깊은 세계의 입구가 될 작은 구멍들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까. 넘치는 예술 '관련' 일들을 끝낸 겨울, 오일파스텔로 종이에 미묘한 노란색과 은근한 연두색을 칠하며 괜히 미워했던 예술 세계를 다시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