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보면 읽히겠지

[쓰다 보면 읽히겠지] 02. 이런 미술, 이런 전시, 이런 삶

문화예술기획 최선영 2025. 1. 10. 14:35
<쓰다 보면 읽히겠지> 
 
나는 혼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문화, 예술 관련 공공 프로젝트나 사업 기획을 하기도 한다. 창작, 기획, 문화예술교육 등을 주제로 강의나 컨설팅을 하기도 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과 마주 앉아 회의도 많이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나 강아지들과의 산책 길에 여러 생각을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과 상상과 심정을 가로지른다. 나는 그 흐름을 글로 옮겨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 문화예술 분야의 질문이 특정 사업이나 제도, 이슈에 대한 한정된 논의로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의 삶은 여러 차원으로 연결, 교차되기 때문이다. 웹진이나 자료집 원고, 사업 보고서에는 담기 애매하지만 분명하게 떠오르는 현재의 질문을 계속 펼치고 싶다.

 
 
 
 
 

쓰다 보면 읽히겠지 02.

"이런 미술, 이런 전시, 이런 삶"

 
 

 
미대 졸업 후 17년째 되던 작년 4월부터 오일파스텔로 작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같이 미대를 다녔던 남편과 마주 앉아 동네에서 작은 그림모임도 진행하곤 했는데 큰 의도나 목표 없이 시작했던 그 활동이 현재는 가장 편안한 취미가 되었다. 취미가 된 예술이라고나 할까. 전시 개최나 포트폴리오 제작, 작품 활동 증빙 같은 목적 없이 우리집 강아지, 어제 찍은 풍경,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휴대폰 사진첩에서 골라 1-2주에 한 장씩 그린다. 그리다 보니 내가 결국 비슷비슷한 색을 고른다는 점, 대상보다는 분위기를 그리려고 한다는 점 등을 발견하고 있다. 
 
 

 
그렇게 9개월째 그림을 그리다보니 수십 장의 그림이 나왔다. 남편 그림까지 합치면 훨씬 많다. 대학에서 예술이 대체 뭐냐고 같이 투덜대던 사이인데 작은 테이블에 앉아 강아지 눈동자에 이 색을 칠할까 저 색을 칠할까 그러고 있으니 참 좋다. 인스타그램에 완성작을 바로 올려서 '좋아요'를 받으며 뿌듯해하기도 한다.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초등학생 때부터 미술학원을 다니며 사과에 명함을 넣고 풍경화 모작을 하던, 그러다가 빡센 미대입시를 해낸, 그리곤 미술계의 문법을 연마했던 나에게 '그림 그리기'는 결코 익숙하지만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며 구도, 명도, 거리감, 형태, 색감 등을 사실 엄청나게 생각한다. 그게 기술인지 습관인지 역량인지 모호하지만 아무튼 그림 한 장을 그리면 에너지가 쏙 빠진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을 한 데 모아 남편과 작년 봄에는 동네 장터에 나가 돗자리 전시를 열었다. 중고물품이나 먹거리를 파는 현장에서 우리는 돗자리에 그림을 가득 채워 놓고 군것질을 하며 좋아했다. 설치와 철수에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수평 수직을 잘 맟추지 않아도, 액자 위에 개미가 기어가도 큰 문제가 없다는 점도 좋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림을 한 점 팔았다. 5만원.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림을 팔았다. 대학 등록금이 얼마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술은 원래 밑 빠진 독에 물 붙기니까. 그동안 참 많이도 부었지.
 
 

 
돗자리 전시 이후에 '이런 전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후 북토크나 워크숍 등 자리에 그림들을 들고가기 시작했다. 갤러리나 미술관이 아니어도 그림이 놓이는 자리가 전시 현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요즘은 캐리어에 그림을 20여 점 담아 기차를 타고 멀리까지 가서 '전시'를 하고 있다. 그림을 여기저기에 깔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왠지 마음이 든든하고 기분도 좋다. 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삶의 방향이나 조각을 그림들이 대변해주기도 한다. 그림은 삶의 풍경이 되고 이야기의 바탕이 되어 나를 지지해준다. 나는 그런 그림도 그리고 그런 전시도 하는 '사람'이 되어 그 순간 존재한다. 그것은 내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신기한 경험이다.
 
 

 
그림 속에 우리집 강아지들이 많이 등장하다보니 반려동물용품 쇼핑몰 홈페이지에 그림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3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 강아지들 이야기를 써서 쇼핑몰 '오래오래닷컴' 홈페이지 대문에 연재를 하고 있는데 3-4개월에 한번씩 강아지들 그림도 전시하고 있다. 우리집 둘째 '귀봉이'가 주인공이라 <귀봉이네 읍내일기>라는 제목으로 그림과 일상을 소개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즘은 남편이 운영하는 작은 문방구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일도 없고 날도 추워서 가만히 앉아 그림을 그리기에 딱 좋다. 완성한 그림은 다이소 액자에 넣어 문방구 한 켠에 둔다. 다음에 또 대화 자리가 생기면 어떤 그림들을 가지고 갈까 생각도 해본다. 이렇게도 살 수 있었다고 미대 다닐 때 누군가 이야기해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한다. 미술작가로 성공하는 것이 다수에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는데, 그렇다면 미술'도' 하며 살아가는 재미를 이야기하는 순간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2025년 새해에는 친구의 아이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귀해서 그 모습을 그려봤다. 그리고 그림을 액자에 담아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친구들 얼굴을 하나씩 그려 나눠주던 중학교 시절도 떠올랐다. 그런 미술도 있었는데, 맞어, 그랬었는데. 
다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주변을 더 정성스레 둘러보는 요즘의 삶이 나쁘지 않다. 그런 경험을 오래오래 할 수 있다면 밑 빠진 독에 부은 물도 다른 줄기로 뻗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춥고 시린 겨울에도 그 물을 얼지 않고 계속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