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애예술, 권리와 욕구에 대한 새로운 이름
사단법인 경기민예총 연간지 <다-다->
수록 원고
장애예술, 권리와 욕구에 대한 새로운 이름
최선영 / 문화예술기획자
예술계 앞에서 궁금했던 것
작가노트는 너무 장황하지도 개인적이지도 않게 A4 한 두장 분량으로 써야 했다. 포트폴리오는 20페이지 정도의 PPT나 PDF 파일 형태로 정리해야 적당했다. 작업만 하지 말고 전시 오프닝을 부지런히 다니며 비평가나 기획자에게 인사를 하라고, 선배들이 이야기했다. 그렇게 예술계 진입에 있어서도 적절하고 적당한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술대학교 졸업반 시절에 많이 듣고 배웠다.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 표현한 것을 ‘보여준다 것’, 보여준 것 중 모든 것이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길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 본질적이고 느린 사유의 시작 혹은 전부였다.
그럼에도 인간이 표현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은 예술 영역에서 가장 미련하고도 치열하게 이어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쓸모나 성과를 전제하지 않는 행위나 사유는 세상 어디에든 있는데 그것이 공식적으로 존재하며 지지받을 수 있는 순간은 많지 않으니까. 그때 예술이라는 벌판, 맥락 혹은 명분이 필요하니까. 그렇기에 매 순간 적절할 수는 없지만 느린 질문도 품는 인간에게 예술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가 사라진 건 오히려 예술계라고 설명할 수 있는 사회적 기회의 테두리 혹은 관계망 앞에서였다. 다양한 창작 활동의 상(狀), 삶의 방식이 포착되지 않으니 예술계 안에 들어가야 예술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 테두리 안으로 진입하는 방법, 그 안에서 자리를 유지하는 예술계의 문법들이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른 방식의 경로, 활동 양상, 삶의 궤적, 그것을 바탕에 둔 어떤 실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 커졌을 뿐 여전히 포트폴리오 정리에 매진하던 시기에 나는 우연히 특수학교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앞에서, 더 커진 질문들
17년 전, 그 현장은 제도적으로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사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연필을 스스로 쥘 수 없는 사람과 ‘미술’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귀를 막아버리는 사람과 ‘음악’이라는 것을 들어야 했다. 자신의 할 말만 끊임없이 쏟아내는 사람을 향해 ‘이것이 예술이니 같이 해보자’고 해야 했다. 그 현장에서의 예술은 무엇인지 혹은 내가 무엇이라고 전제해야 하는 것인지 예술에 대한 질문은 더 커져버렸다. 차라리 예술계를 염두에 둔 예술, 사실상 비장애인의 신체와 삶의 조건에 맞춘 예술만을 궁금해하면 수월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문화예술교육 현장에는 외면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났고 그것은 내가 공부한 예술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 전반의 촘촘한 이슈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교실에서 만나는 초등학생 OO가 5년째 말없이 한 손으로 끈을 흔들고 있는 상황, 그 이유나 의미를 주변 사람들이 각자 예측하거나 해석 중이지만 알 길이 없는 상황, 그럼에도 OO가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안도하는 분위기, 나도 그 안도감에 기대어 색종이를 찢어 OO의 머리 위에 뿌리며 ‘예술이니까 해보자’고 속으로 되뇌던 순간, 그때 이게 진짜 예술인 건지 돌봄인 건지 혹은 나의 일방적 표현인 건지 알 길이 없는 상황, OO에게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난 사실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어서 집에 가서 수업일지나 잘 써보자고 다짐하던 마음, 그렇게 집에 돌아오는 날들이 한 해 두 해 이어질수록 OO와 나 모두에게 연결된 ‘사회’라는 거대한 세계의 어떤 이면이 자꾸 궁금해지던 시기.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 혹은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예술의 저 깊숙한 뿌리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당시에 그 감각이 논리적으로 정리되지 못했기에 그것은 ‘느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것은 예술계 앞에 우두커니 서서 경험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또한 그것은 장애인이라는 타자를 이해하는 태도에의 학습도 아니었다.
장애예술로 점프해 버린 질문들이 새로움으로 해석될 때
몇 년 사이 ‘장애예술’*이라는 말이 생겼고 나는 현재 그 말이 붙은 여러 공공기관의 사업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문화다양성, 무장애, 장애+비장애 통합 등의 표현이 서로 엇갈리는 문화예술 현장에서도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여러 이름과 이유들이 다양성의 가치를 품고 정책적, 사회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흐름 속에서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확장된 시선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애예술을 새로움의 등장이라고 보는 것은 다소 과한 해석이다. 기존에 있었으나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영역까지 사회적 시선이 닿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장애예술’이 새로움의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첫째, 장애나 장애인 중심의 창작활동이 사회적 관심을 얻는 양상에 대한 새로움, 둘째, 장애나 장애인 관련 창작활동 및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언어에 대한 새로움 때문이다.
그 새로움은 주로 비장애인 중심의 관점에서 축적된 예술의 문법, 예술계의 범위, 미학적 언어나 개념을 전제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두 팔과 다리를 움직여 오랜 기간 연습한 동작을 음악에 맞춰 무대에서 선보이는 무용 공연에 대한 해설 혹은 비평의 언어는 다른 신체적 조건을 바탕으로 자신의 개별성을 보여주는 움직임 공연을 만났을 때 기존의 관점 혹은 비평의 근거를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춤, 무용, 예술은 무엇인지에 대한 다른 언어를 모색해야 한다. 사실 그 탐구의 과정이 새롭게 인식될수록 기존의 관점과 언어가 더욱 좁은 의미에서 고도화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 대한 탐구의 맥락에서 예술을 설명하고자 했던 언어가 이미 풍부했다면 기존의 언어들은 사회적 변화 속에서 덜 새롭게, 더 유연하게 질문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장애예술’이 예술 영역에 던지는 질문은 그 존재 자체로 새롭다기보다는 상황적으로 새롭게 해석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장애 옆에서 나란히 흐르는 질문들
그럼에도 새롭게 등장한 이름, ‘장애예술’은 강력하다. 그 강력함을 바탕으로 많은 제도가 생겨나고 시행되고 있다. (‘장애예술’ 또한 정책이 만들어낸 말이다.) 특히 장애인은 예술활동에 있어서 정책적 지원을 (충분히는 아니지만) 이전보다 더 많이 받고 있다. 이에 따라 더 다양한 사람들이 창작의 기회를 갖게 되거나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관객이 장애 당사자의 다양한 감각, 목소리, 서사가 담긴 표현 행위나 현장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다. 이러한 흐름은 공공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그런데 ‘장애예술’이라는 이름에서처럼 ‘장애’ 옆 ‘예술’은 여전히 그 모호함을 뽐내며 나란히 흐르고 있다. 그러니까, 창작의 주체가 장애인이라는 점, 혹은 창작 안에 장애 경험을 담아낸다는 점 등의 조건은 오히려 명확한데 그 조건을 바탕에 둔 ‘예술’은 지금 시대에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 어려움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한계가 아니라)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정의의 어려움, 해석의 어려움은 구체적이고 빠른 정책의 확대로 인해 충분한 어려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현재 정책 안에서 예술은 장애인이 전시를 하는 것, 연극을 하는 것, 악기를 연주하는 것, 소설을 쓰는 것 등으로 명확하게 해석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장애인의 작품 발표 횟수나 규모를 늘리는 것, 그 지원의 방식을 구체화하는 것, 관련 교육 기회를 만드는 것 등이 제도에서는 빠르게 합의되어 추진될, 심지어 성과가 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장애인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예술계에 진입하는 것으로 쉽게 해석되기도 한다. 예술계 진입과 활동기회 마련이 장애인의 예술 활동 지원의 목적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주로 비장애인이 예술계에 진입할 때 했던 방법들을 장애인에게 교육하는 프로그램 운영이 확대되고 있다. 이것은 장애인이 다양한 학습 및 경험의 기회를 갖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과도 관련이 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필요한 움직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제도의 목적이 예술 활동의 지배적 의미, 혹은 장애인 예술 활동의 주요 목표로 전제될 가능이 크다는 것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장애 유무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예술계에 진입하는 것만이 예술하는 것의 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예술을 한다는 것은 '예술도 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전제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예술가 개인이나 관련 정책이 향하는 목적의 전부가 되기도 한다. 특히 장애인은 성인 이후 불안정한 삶으로 인해 전업 예술가가 되는 것, 예술 관련 직업을 갖는 것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인 상황이다. 장애예술이나 장애인 문화예술교육이 곧바로 장애인의 문화예술 분야 일자리 창출 논의로 이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듯이 말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준을 갖추거나 고정된 영역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개념화할 수 없는,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예술'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장애인이 일상적으로 예술을 접하거나 시도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지만 그럴수록 다양한 '예술하기'의 상(狀)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장애 유무를 떠나 한 사람이 예술을 한다는 것, 혹은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에 대해서 말이다.
여러 질문들이 숨기 좋은 대주제, 장애
우리가 예술에 대한 논의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마주할 수 있어야 장애나 장애예술에 대한 논의도 그야말로 새로움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은 복잡하고 어렵고 전문적인 언어들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누군가가 예술 혹은 자기표현을 하고자 하는 욕구나 상황, 그때 그 사람이 경험하거나 시도하는 무언가, 그 과정에서 그동안 예술로 해석되지 않았던 지점을 들여다보는 시선 등이 필요하다. 사실 첫 단계에서부터 논의는 어려워진다. 누군가 예술을 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은 삶에서의 어떤 경험과 학습의 기회를 바탕으로 ‘예술’을 상상할까. 그 사람은 자유로운 선택과 시도가 가능한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을까. 혹은 그 사람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까지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시도해야 할까. 그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관점이나 활동의 사례를 ‘장애인’의 선택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까. 혹은 그 사람이 특정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선택을 장애 유형을 근거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장애인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제도가 확대되면서 한 개인의 표현 행위는 장애를 설명하거나 보여줘야 하는 상황 안에 놓이기도 한다. 혹은 창작활동의 주체가 장애인이어야 한다는 지원의 근거가 작동하면서 당사자성을 애써 드러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창작 맥락을 결국 장애로 수렴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는 예술에 대한 질긴 질문이 장애라는 거대한 주제 뒤로 밀려나기도 한다. 장애인이 제도 안에서 점점 더 많이 포착되어야 한다는 정책적 과제가 현장에도 영향을 미쳐 결국 장애인이 제도권 예술이나 예술계 안으로 진입하는 데에 다수의 에너지가 집중되기도 한다. 예술의 여러 모습, 불명확하고 불안정한 순간들은 시대적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고 덜 예술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예술의 어려움이자 특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애예술 관련 창작의 순간들이 더욱 일반성을 획득하는 것과 거리를 둘 때 예술적 순간이 구현될 수 있다. 아주 조금 움직이는 것, 아주 천천히 드러내는 것, 아주 심하게 반복하는 것, 보여준 것을 다시 덮어버리는 것, 언어로 의미화되기 전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개별성의 생경한 면을 드러내는 것, 장르 중심의 활동에 머물지 않는 것, 예술계 진입에만 집중하지 않는 것 등의 방식으로. 각자의 표현 욕구와 권리에 집중한 미련한 방식으로. 그것이 예술로 평가되는 것과 상관없이.
인간을 향한 질문들을 이어가기 좋은 장소, 예술
예술에 대한 논의가 더 넓어지기를 기대할 때 나는 다시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떠올린다. 예술계에 진입하는 것이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들, 또는 사실상 매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이들 중에는 장애가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더 현실적으로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문화적 자본을 가지고 있는지, 삶을 지탱해 줄 가족이나 동료가 있는지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각자의 감정, 이야기, 욕구, 관심사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그 권리가 잠시 구체화되는 장소다. 장애인을 포함한 다양한 표현 주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나면서 원래 존재했던 누군가의 권리가 예술이라는 영역을 가로지르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특수교육의 대상자나 복지제도의 수혜자로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 표현하고 싶은 사람,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사람, 함께 살고 싶은 사람으로서 말이다.
예술은 그 목소리들이 작품으로 발표되는 장소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계 안에서만 그 목소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목소리는 몸짓, 중얼거림, 침묵, 드러누움, 낙서, 혹은 그저 생경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 바탕이 되는 개개인의 욕구가 자유롭게 표출되기 어려운 세계에서 오히려 예술은 다른 상태이자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다시, 연필을 스스로 쥘 수 없는 사람이 ‘미술반’에 들어온다. 큰 소리에 귀를 막아버리는 사람이 ‘음악’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기존의 미술과 음악이 어떤 방향과 가능성을 향해 해체되어야 인간을 향한 질문을 넓게 끌어안을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누가 어떻게 예술가로 성장하는지, 무엇이 예술로 평가받는지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 예술은 중요한 질문들의 토론장만은 아니지만 어렵고 어려워 외면하고 싶은 질문들의 자리로도 존재해야 한다. ‘장애예술’은 그 질문을 아주 조금씩, 천천히, 계속해볼 수 있게 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 자리에서 새롭게 인식될 수 있는 건 다른 관점을 가져보려고 하는 사유의 주체, 오직 자신뿐이다.
* 문화다양성과 평등의 기조 아래 ‘장애’, ‘장애 예술’을 접근할 경우, 장애 예술은 하나의 고유한 영역으로 간주되어진다. 즉 장애 예술은 장애인에 의해, ‘장애’ 라는 경험이 반영되어, ‘장애 요소’를 매개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021년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실태조사 및 분석연구_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제1차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향후 5년간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정책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였다. 2023년에는 장애예술인 작품발표 기회 확대를 골자로 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장애예술인 창작물 우선구매 제도」도 시행되었다. 또한 국내 첫 장애예술인 표준공연장 ‘모두예술극장’이 개관하는 등 장애인의 문화예술활동 관련 공공 지원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렇듯 국내 장애인 예술 활동은 분명하게 정책적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기에 이것을 전제한 논의가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장애예술은 정책이 주도해서 의미화, 활성화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