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보면 읽히겠지] 06. 계속 무리하세요
<쓰다 보면 읽히겠지> 나는 혼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문화, 예술 관련 공공 프로젝트나 사업 기획을 하기도 한다. 창작, 기획, 문화예술교육 등을 주제로 강의나 컨설팅을 하기도 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과 마주 앉아 회의도 많이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나 강아지들과의 산책 길에 여러 생각을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과 상상과 심정을 가로지른다. 나는 그 흐름을 글로 옮겨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 문화예술 분야의 질문이 특정 사업이나 제도, 이슈에 대한 한정된 논의로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의 삶은 여러 차원으로 연결, 교차되기 때문이다. 웹진이나 자료집 원고, 사업 보고서에는 담기 애매하지만 분명하게 떠오르는 현재의 질문을 계속 펼치고 싶다. |
쓰다 보면 읽히겠지 06.
"계속 무리하세요"
1.
지난 겨울이 시작될 무렵, 문화재단 실무자들이 참여하는 네트워크 파티에 짧은 토크 진행자로 참여했다. 그 파티는 실무자들의 고민이나 현재 상황을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는데 나는 주로 이런 자리에 '이런 이야기까지도 가능합니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역할로 참여하곤 한다. 그건 매우 감사하고 반가운 일인데 나에게 솔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망설이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무언보다 안전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 자리에서 30분 정도 요즘의 생각과 일상을 이야기했는데 그 주제는 "무리무리 하세요"였다. 문화재단이든 작은 단체든 한 조직 안에서 개개인은 무리해야 하는 순간이 많다. 조직 밖에서 밥을 챙겨먹고 가족을 돌보고 자신의 건강을 챙기며 미래를 그리는 것도 무리하기의 연속이다. 유튜브 썸네일에서 볼 법한 "이것만 알면 한 방에 해결!" 같은 말들이 주변에 넘치지만 사실 무리해야만 하는 순간이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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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토크는 나에게 자연스러웠다. 무리했던 이야기, 무리하고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태를 인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니 참여한 사람들과도 '지금 해볼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빔프로젝터로 아예 '무리무리 하세요'라는 말을 크게 띄워두고 이야기를 하니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2.
내가 무리하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건 2023년 봄부터다. 예술하는 것의 무리하기에 대해 수다를 떨고 전시를 하며 그 과정을 기록, 공유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었기 때문이다. "무리무리 아무리"라는 제목의 그 프로젝트는 전시 <혼자라면 무리지만>, 토크 <사는 것도 무리지만>, 워크숍 <말하기엔 무리지만> 등으로 구성되었다. 아무리해도 무리인 것을 계속 하는 무리들이 예술가라는 생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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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는 장애예술 관련 작업으로 제안을 받았지만 나는 장애유무를 떠나 인간의 예술하기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각자의 삶이나 신체적 조건에 따라 무리하기의 양상이나 정도에 분명 차이는 있으나 일단 예술을 한다는 것이 너무 아름답거나 당연하게 전제되지 않기를 바랐다. 거의 6개월 동안 여러 사람들과 예술하기에 대해 수다를 떨었는데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예술가가 오히려 무리하기를 선택하거나 원한다는 것이었다. 쉽고 익숙하고 일반적이고 효율적인 방식 대신 미련한 행위를 선택하거나 해보려는 사람들. 그들은 스스로 그것이 힘들다고 말했으나 그 방식이 자신에게 맞거나 필요하다는 것을 실제 작업으로 보여주었다. 덕분에 프로젝트가 끝날 때쯤 우리는 허허 웃으며 "거봐, 어차피 무리할 거잖아"라고 말할 수 있었고 서로의 예술하기를 응원할 수 있었다.
*무리무리 아무리
https://uugoorichoi.tistory.com/m/48
[기획] 무리무리 아무리
는 ‘모두예술주간 2023 : 장애예술 매니페스토’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6개월 동안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모두예술주간’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2020년부터 주최·주관 하고 있다. 모두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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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작년 가을에는 장애예술 관련 강의를 하러 부산에 간 적이 있다. "무리무리 아무리" 프로젝트 이후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힘들고 특별힌 예술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해내야 하는지 설명하는 대신 강의나 대화 끝에 밝게 웃으며 "계속 무리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부산에서 한 장애인 예술가의 부모가 자녀의 창작 방식에 대해 다소 걱정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을 때, 나는 "어차피 자녀분은 계속 무리할 거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같이 계속 무리하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우리는 서로를 보며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확인한 것처럼 밝게 웃었다.
4.
부산에서와 같은 대화를 여러 현장에서 종종 경험한다. 그런데 그 무리하라는 말은 단순히 힘든 과정을 지속하라는 의미로 상대방에서 전달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이 무리하고 있음을 누군가 알아봐 준다는 것, 그리고 예술하기든 살아가기든 그 방식을 인정해 준다는 것에 누군가는 힘을 얻는 것 같다. 무리한 짓 그만하고 적당히 하라는 충고보다 계속 무리하라는 말이 그 사람의 방식을 인정해 주는 태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쉬운 방법을 찾는 대신 자신의 방법을 미련하게라도 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다른 인사와 응원이 필요한 것이다. 무리함의 끝에 모두가 번쩍이는 트로피를 들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그 트로피를 향해서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이해가 되지 않는 방식, 속도, 밀도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늘도 흥미롭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