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공동창작워크숍 <지구와 예술> 자료집
바로 그 나무를 만난 내가 글을 쓴다
최선영 / 유구리최실장
뿌리를 내린다는 말은 멋진 말이었다. 예술과 관련해서든 삶에 대해서든. 하지만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오고 난 후 멋진 말들은 질기거나 무섭거나 너덜너덜하거나 푸르딩딩한 감각이 되었다.
남편과 흙집을 고치고 마당을 정리하고 산길을 거닐다 보니 그 감각들은 더욱 구체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뿌리를 내린 나무도 멋져 보이지 않았다. 그 나무는 하늘을 가리는 길목에 있었기에 어서 베어버려야 할 놈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보자니 주변에 나무가 너무 많았다. 싹 다 베어버려야 한다는 강한 의지만 불타올랐다. 저 뒤에도 나무고 그 옆으로도 온통 나무였다. 흙집을 빙 둘러싼 나무들 사이로 어느 날 뱀이 스물스물 올라올 가능성도 있었고 가을이면 쓸어 담기도 힘든 낙엽들이 마당을 가득 매웠다. 그러고 보니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대단하다기 보다는 참 징하다는 느낌이었다.
톱을 가져와 팔꿈치를 앞뒤로 빠르게 움직여 그 뿌리를 잘라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잘한 뿌리라도 손으로 잡아 뜯어보려고 했지만 끝없이 다른 뿌리들이 솟아 나왔다. 도끼로 굵은 부분을 뚝 끊어버려도 남은 뿌리가 새로운 작전을 짤 것도 같았다. 무언가가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기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말이 잔인하다기 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는 정확한 표현으로 느껴졌다.
광고와 상품, 기계음으로 가득 찬 도시를 떠난 것은 이런 구체적인 감각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매일 눈과 귀와 코와 손끝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예상 밖의 기억들로 쌓이고 있다. 그리고 이름 모를 벌레부터 끈질긴 뿌리까지 온통 각자의 언어를 나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소설책이나 기획서에서 보던 낭만적이거나 이상적인 표현들 대신 냄새나고 끈적 거리고 빠르게 변하는 언어들이 나를 관통했다. 나무라는 말은 이제 푸르다 라는 서술어를 짝꿍처럼 데려오지 않았다. 나무는 무섭다. 한여름 나무들은 정말 무섭다. 푸르지 않고 시퍼런 나무들. 아차, 가을이 되면 나무가 뱉어내는 언어는 무섭다와는 사뭇 다르게 금방 바뀐다. 더 정확히는 9월 말의 나무들, 10월 중순의 나무들, 그리고 11월 초의 나무들은 모두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 언어들은 내 발끝을 따라 동네를 흐르다 나의 말들이 된다. 말들은 마음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게 되었고 그러고 싶게 되었다.
작은 풀도, 이리저리 누운 벼들도, 부지런한 거미도, 새벽을 채우는 안개도, 읍내로 가는 길도, 분명한 어두움도, 소박한 천변도, 저쪽 집 뒷마당의 염소도 모두 나에게 말을 건내어 내가 말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이젠 나도 그림을 그려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마음에는 낯선 그림들이 그려지고 있어 뭐 딱히 연필 같은 걸 주워서 무언가를 남기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했다.
미대를 졸업하고 가끔 전시도 했지만 그것은 예술계로 나를 등 떠밀어 세워보는 짓이기도 했다. 사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떠오르지 못했는데 나는 새로운 장면을 그려낼 수 있다고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내가 그 당시를 살아갈 수 있게 했지만 금세 나를 지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 혹은 예술계에 대해 요즘은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무서운 나무들을 바라보며 내가 나로서 이 세상을 얼마나 감각하고 있을지 생각해본다. 푸릇푸릇하고 적당히 균형 잡힌 나무들은 인터넷 검색창이나 도시 곳곳에 설치된 현수막, 포스터, 펜스 등에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나로서 나무를 감각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든다. 그러고 싶은 나의 호기심도, 필요도 줄어든다.
하지만 내가 마당에 작은 길을 내기 위해 나무를 잘라야겠다고 판단하면 나는 바로 거기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만지고 흔들고 내리찍으며 감각 한다. 이 나무 무섭구나, 질기구나, 따갑구나, 부스러지는 부분도 있구나, 딱딱한 줄기도 있구나, 뿌리는 삽으로 건드려도 꿈쩍도 안 하는구나 등등. 낯선 도구를 집어와 잠들어 있던 근육을 움직이며 그 나무와 팽팽하게 만난다. 땀도 나고 손도 다친다. 신발에는 흙이 들어가고 이마에는 상처가 난다. 나무는 어느새 나무라는 세계가 되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나는 어여쁜 나무 일러스트들을 잊어버리고 탱탱한 줄기를 두 손으로 잡아당긴다. 나무를 이기도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고 나면 오직 한 그루 나무에 대한 감각이 나의 언어로 조금 소화된다. 그러면 나는 나무에 대해 나로서 표현하고 싶어진다. 혹은 질려서 피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어쨌든 나무에 대한 남들과 다른 나의 감각을 내 몸에 남긴다.
예술이 무엇인지, 예술가는 어떠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나로서 감각하고 싶다. 많은 정보와 이미지가 매일매일 내 머리를 두드리고 있지만 손끝을 얼얼하게 만들거나 눈을 시큼거리게 만드는 작고 깊은 경험들을 하고 싶다. 내가 그것을 계속 궁금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살아가는 힘도 질긴 뿌리처럼 어딘가로 뻗어나가게 되지 않을까.
오늘은 산 중턱에서 노랗게 물들어가는 몇 그루의 나무를 보았다. 그 노란색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오늘 밤 잠자리를 채우고 며칠 후 서너 줄로 내 노트에 남을지 모른다. 나는 그때의 나를 잊지 않으려 애쓸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떤 정서나 장면이 다른 장소에서도 그려질지 모른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 흔적들을 한 데 모아 예술 같다고 한다해도 그것은 예술이 아닐지 모르는데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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