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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글] 장애, 그리고 예술이라는 함정 옆에서 ‘예술하기’

by 문화예술기획 최선영 2022. 11. 11.

감성정책연구소 
인간 탐구로서의 장애예술 연구 - 장애예술 사례 분석과 비평 연구 워크숍
비평집 원고
 
 
 

장애, 그리고 예술이라는 함정 옆에서 ‘예술하기’

 
 
최선영 / 유구리최실장
 
 
비장애인 중심에서 정의된 예술의 범위

장애인의 예술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움직임이 커지면서 사회적으로 장애예술과 장애예술인에 대한 개념 정의가 요구되고 있다. 여러 연구나 현장의 해석에 따라 그 정의는 재구성되거나 확장되고 있는데(각주1. 최근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2021년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실태조사 및 분석연구’에서는 장애예술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장애인복지법」에 의해 등록된 장애인으로, 장애에 대한 정체성을 토대로 장애의 정치적, 개인적, 미학적 의미를 의식하여 다양한 형태의 예술창작 활동을 하는 자임. 또는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른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전문적 예술인 또는 예술창작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자로 인정을 받았거나 받을 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음. 다만 예술활동을 반드시 업으로 하지 않더라고 지속적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면 장애 예술인으로 간주할 수 있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과 예술인을 정의하기 어렵다는, 그 불확정성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술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새롭게 정의되고 다시 해체되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다양한 예술 활동 주체가 등장하고 문화다양성 담론이 확장되는 등 시대적 흐름이 변화하면서 주로 비장애인 중심으로 전제되었던 예술(인)에 대한 정의도 다층적인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논의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로 인한 예술(인) 정의의 어려움, 혹은 불편함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주로 누구일까. 주로 비장애인이 시도했고 할 수 있었던 예술 활동의 흔적들을 결국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해석, 개념화했던 ‘예술’이라는 게 있는데, 다른 입장과 필요로 인해 그것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면 과연 누구의 복잡함이 더 커질까. 자신의 사회적 권리를 주장하거나 요구하는 입장에서는 기존의 예술 개념 혹은 방법론을 이해하거나 학습하는 것의 어려움은 있지만 그것은 반가운 어려움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에게 익숙했던 개념이나 범위를 해체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당사자성이나 당위성을 전제하기 어려울 경우 더욱 복잡하고 불편한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진입하고자 했던 세계의 경계와 위치를 해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 예술 및 장애예술 정의의 불확정성에 대해 더 복잡한 입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주로 비장애인 관점에서 구축된 예술 개념에 익숙하거나 그 개념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예술 및 장애예술 정의의 불확정성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리고 예술 활동 참여 자체가 어려운 사람과 기존 예술계에 접근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사람들 간 사회적 활동의 격차가 커짐과 동시에 예술을 개념화하는 관점, 혹은 해체하려는 의지에도 큰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장애보다 더 큰 함정, ‘예술
그렇기에 장애예술을 정의하는 차원 이전에 낯선 표현 행위나 창작을 예술로 호명하는 과정에서 각자에게 더 큰 질문이 되는 것은 결국 ‘예술’이다. 장애인이 예술 활동을 하는 것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의 차원이 아니라 익숙했던 개념 밖의 무엇을 어디까지, 왜 예술로 볼 것인가의 질문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혹은 무엇을 예술로 명명해야만 하는 이유, 명명하지 않으려는 의도, 명명하기에 망설여지는 상황 등이 장애 유무보다 더욱 날 선 질문이 되어 각자에게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질문을 되받는 사람의 장애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장애인이라고 더욱 확장되고 해체된 예술을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비장애인이라고 마냥 기존 예술 개념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예술의 다른 형태나 모습도 찾고 싶은 의지, 혹은 기존 예술 개념으로 여러 시도들을 수렴하거나 판단하려는 의지가 각자의 입장에서 작동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입장인지, 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애예술이든 예술이든 그와 관련된 비평이든 시작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술을 각자 다른 기준으로 해석하려고 할까. 누군가는 왜 본인도 진입하기 어려운 예술계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애를 쓰며 기존 예술의 개념을 강화하려고 할까. 또 누군가는 왜 기존 개념으로는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며 너무 낯설거나 미세하거나 느린 활동을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런데 예술은 각기 다른 해석으로 나아가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사회적 존재 가치가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각자의 해석과 욕구는 그 자체로 중요하기도 한데 한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은, ‘현재 예술은, 혹은 장애예술은 과연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넓은 개별성의 스펙트럼과 다양성
여기에서 논의를 다시 좁혀 ‘장애예술은 과연 다양성을 띄고 있는지’ 질문해본다. 장애인은 예술 영역 안에서, 혹은 표현의 주체로서 개별성의 스펙트럼을 넓게 보여줄 수 있는 존재다. 비장애인에게는 좁은 범위의 표현 행위로 보일지라도 오히려 미세한 근육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자신만의 표현 방식과 범위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 장르 중심으로 분류되었던 활동을 개별화된 표현 행위 자체로 펼쳐 보여줄 수 있는 사람, 신체의 감각에 집중한 세밀한 표현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 장애 유형 중심이 아니라 삶의 서사나 특성을 중심으로 개별적 존재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 등으로 장애인을 다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장애인 중심으로 전제되었던 다양성을 장애인의 개별성을 바탕으로 다시 펼쳐보면 훨씬 넓은 다양성이 그려진다. 예를 들어 시각적 표현에 있어서 표현의 주제나 매체만이 아니라 표현을 하기까지 과정의 루틴, 속도, 창작자의 신체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의 궤적이나 떨림 등이 다양성을 구성하는 넓은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넓은 개별성의 스펙트럼이 장애예술의 다양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은 예술의 다양성을 확장하는 것과도 연관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개별성이 등장할 수 있는 환경과 그것을 다양성의 일부로 해석할 수 있는 관점인데 현재 국내에서는 이러한 환경 마련과 관점 확장을 위해 제도적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장에서도 그동안 실행하기 어려웠거나 낯설었던 창작 및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예술이라는 용어가 제도적으로 사용되기 전부터 시도된 개별적 움직임이 쌓여있어야 현재의 다양성도 넓은 토대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러기 어려웠다는 점을 먼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왜 개별성의 등장이 지속되기 어려웠는지에 대한 논의와 진단이 필요하다.
 
개별성이 돌출되는 자리와 이유
비장애인에 비해 예술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얻기 어려웠던 장애인의 표현 행위는 오히려 예술을 학습하는 기관이나 시스템 밖에서 이루어져 왔기에 기존 예술계에서는 낯선 개별성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날 것의 가치나 야생성이 살아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것의 미학적 가치에 집중하기 전에 인간으로서 장애인의 삶을 향한 질문도 필요하다. 장애인이 일반적인 예술교육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기 어렵다는 것은 다양한 자기표현의 권리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 장애인은 일반성을 갖춘 예술 관련 기술이나 방법론을 학습하는 시스템 안에서 주로 보호나 관리를 받으며 살아왔기에 야생성, 개별성을 충분히 드러내기 어렵다. 장애인이 자기표현을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을 찾기 위해 어떤 장소로 이동하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막연하게 장애예술 안에 개별성이나 야생성이 살아있다고만 보는 것은 그러기 어려운 현실을 외면한 과한 의미 부여나 기대일 수 있다.
따라서 장애예술인의 예술 활동을 개별성의 맥락으로 바라볼 때는 일반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날 것의 표현 요소뿐만 아니라 학습해온 일반성을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이유나 과정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특수학교나 복지관에서 주로 A4 용지에 출력된 흑백 도안을 색연필로 꼼꼼히 칠하는 이른바 ‘색칠공부’를 10년 이상 해온 장애인이 있다면 이 사람은 색칠을 하는 방법의 일반성을 시스템 안에서 반복적으로 학습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시각적 표현 활동의 대부분이 색칠공부일 때 이 사람은 어떤 자기표현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수십 가지의 물감을 마주하고 색을 고르고 칠하고 뭉개고 다시 칠해보는 경험도 매우 낯설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물감을 종이나 캔버스에 바르는 과정은 다시 일반적 시각 표현을 학습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이 그것을 어느 정도 학습해야 다른 표현이 가능할 때도 있고 그 매체에 익숙해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장애인은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주로 제도나 사회 안에서 일반성을 학습하는 것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흑백 도안을 꼼꼼하게 칠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도안을 벗어나는 개별화된 표현 행위는 환영받기 어렵다. 하지만 예술 영역에서는 도안을 칠하는 행위 외에도 그 도안이 과연 필요한가를 질문하거나 각자가 자신의 도안을 그려보는 것도 가능한다. 오히려 실험적이거나 새로운 시도 자체가 더욱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렇기에 장애인의 개별성을 예술 영역에서 살펴볼 때는 독특한 표현 자체로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별성이 돌출되는 자리와 이유를 들여다봄으로써 창작 과정을 둘러싼 여러 맥락을 함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인이 만든 작품이기에 개별성이 살아있다는 해석만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일반성을 학습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서 남긴 개별성의 흔적들, 그것이 예술 영역에서 어떻게 표현으로 드러나는지를 읽어내는 시선이 필요하다.
 
직업군 개발, 장애의 주제화, 그 외의 예술하기

(각주2. ‘예술하기’는 ‘예술 활동’보다 더욱 주제적인 진행형의 표현이다. 누군가가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작품을 제작하거나 발표하는 것만을 전제하지 않는다. 또한 그러한 목적을 위한 계획된 활동만을 포함하지도 않는다. 이후 무언가가 될지, 어떤 가능성이나 현장성을 만들어낼지 모를 행위 자체를 이어가는 것으로서 ‘예술하기’는 의미가 있다. 또한 ‘누군가가 어떤 사유나 행위를 하고 있는 순간’ 자체가 예술의 가치를 살아있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이 글에서는 ‘예술하기’라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개별성과 관련된 확장된 관점과 언어가 필요한 이유는 첫 번째, 최근 ‘예술하기’가 장애인의 직업군 개발 및 사회활동의 돌파구로만 해석되는 상황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애인이 성인이 된 후 생산성 중심의 노동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일자리나 직업을 찾기 어려운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술을 한다는 것이 현실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전제될 경우 이름 없는 표현 행위, 그와 관련된 창작의 과정은 개별성의 일부로 시도되거나 지속되기 어렵다. 그리고 보편성, 안정성, 일반성이 핵심 가치가 된 장애예술인의 성장이나 육성 사례만 많아질 수 있다. 상대적으로 유통 가능한 형태의 결과물이 나오기 쉬운 시각예술 분야가 미술시장을 중심으로 장애예술인의 육성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와 관련이 높다. 물론 이러한 현실적 움직임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직업군 개발과 연결하기 어려운 표현의 순간이나 창작 활동이 그 자체로 존중받으며 지속되기 위해서는 예술하기가 장애인의 삶에 왜 지속될 필요가 있는지 근본적 질문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다양한 신체와 삶의 역사를 가진 주체들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삶에서 예술하기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표현 행위를 둘러싼 다층적 논의가 장애라는 주제로만 수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장애예술인의 당사자성, 장애 특성이 주제가 되는 예술하기가 많은데 그것이 비평 요소 중 전부가 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이 표현 행위를 하는 다양한 상황과 정서, 맥락, 그리고 개별성 등이 등장하여 교차할 수 있어야 궁극적으로 장애예술이든 예술이든 확장된 논의와 비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 누군가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하게 되는 창작도 있으나 그 과정이나 결과가 장애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창작이 인간과 사회를 향하는 뾰족한 질문으로 뻗어나가는 데에 장애라는 주제도 큰 함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장애인의 삶에서 ‘예술하기’의 일상화
그렇다면 앞으로 장애예술에서 개별성과 다양성이 살아있는 현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적 흐름과 지원이 필요할까. 여기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먼저 ‘예술하기’가 장애인의 삶에서 어떻게 위치되어 있는지 생각해보면 논의는 더욱 복잡해진다. 사회적 불평등이나 제도적 한계가 맞물리면서 장애인이 예술을 하는 경험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고 싶은 순간에 해보고 싶은 방법으로 시도해보는 경험이 일상속에 없을 때 장애인은 계속해서 프로그램 수혜자나 향유자로 위치된다. 이때 프로그램은 결국 몇 가지의 장르로 구분된 표현 방법 및 학습 주제로 장애인에게 전달되곤 한다. 또한 주로 치료나 복지의 목적으로 기획된 프로그램 안에 실험적이고 섬세한 예술의 의미는 충분히 담기기 어렵다.
그렇기에 장애인이 어떻게 예술을 교육받을 수 있을지, 예술을 향유할 수 있을지, 예술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을지 등의 질문 이전에 더욱 본질적으로 ‘장애인의 삶에서 예술하기의 일상화가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논의가 중요하다. 이때 사람마다 예술하기의 방식과 속도가 매우 다를 수 있기에 결국 개별성 중심의 논의도 뒤따르게 된다.
 
‘예술하기’의 지속을 위한 환경
이에 따라 장애예술에 대한 지원은 근본적으로 장애인이 예술하기를 이어갈 수 있는 환경 마련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장애인이 성인이 되기 전에도 문화예술 향유 및 학습 기회를 충분히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자기표현의 기회도 다층적이고 일상적으로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현재는 이러한 토대도 부족한 상황이라 평등하지 못한 문화적 자원에 의지해 장애인이 ‘각자 알아서’ 예술인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책은 그렇게 성장한 소수의 장애예술인을 어떻게 얼마나 지원할 것인지에 집중한다. 그보다는 예술하기의 일상화, 자기표현의 욕구 및 의지를 가진 장애인의 학습 및 활동 기회 지속에 무게를 두고 권리 중심의 장기적 지원을 상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 번째, 작품 제작이나 발표 등 완결성 중심의 ‘활동’보다는 과정적으로 예술하기를 하고 있는 예술‘인’을 지원해야 한다. 이때 작품이나 사업이 아닌 사람에 대한 지원은 개별화된 속도와 방식을 존중하고 응원한다는 공공 영역의 메시지로도 해석 가능하다.
두 번째, 다양한 신체와 감각을 가진 예술인의 일상적 교류가 자연스러울 수 있는 환경을 지원해야 한다. 비장애인은 예술하기를 여러 분야나 주제로 연결할 수 있는 일상적 교류가 가능하다. 이동과 소통에 있어서 자유롭기 때문에 새로운 커뮤니티나 학습 공동체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은 특히 일상적 이동이나 교류를 통한 협력, 협업이 어려워 현재의 활동을 다음 활동으로 연계하기 어렵다. 따라서 다양성의 가치를 중심으로 교류하는 기회가 제도적으로라도 이어져야 한다.
세 번째, 일반성에서 벗어나는 예술의 상(想)도 있는 그대로 등장하여 조명받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술에서는 실험성, 도발성, 즉흥성, 모호성 등도 중요한 속성이자 가치가 된다. 하지만 장애인의 불안정한 삶 속에서 장애예술은 일반성의 획득, 사회참여 기회 및 일자리 마련의 돌파구 등으로만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에 따라 일반성과 안정성을 갖춘 창작 방식이 장애예술의 상을 지배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각자의 미세하고 독특한 표현 양식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예술 및 장애예술의 상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사회적 성공을 이루거나 일반적인 작품 발표를 이어가는 장애예술인 외에도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예술하기를 이어가는 사람을 정책 단위에서도 조명하는 움직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을 향하는 지속적인 지지
마지막으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지원은 시간의 축적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장애예술인과 주변인, 매개자 등이 각자에게 자연스러운 방향성을 찾을 수 있도록 충분히 탐색하고 실험할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하다. 또한 오랜 시간 동안 새로운 사례나 실체를 만들어온 개인이나 단체들이 현실적 어려움 앞에서 활동을 멈추거나 단체 운영에만 몰두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원제도가 개별 현장의 대안이 되기는 어렵지만(현장에서도 지원제도에만 의존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하지만) 장애예술 관련 활동이 공공 영역에서도 지지와 응원을 받고 있다는 신호는 계속 발신될 필요가 있다. 이때 그 신호가 어떤 예술의 상을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지속성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정책 단위에서는 주로 지원의 근거, 규모, 방식을 논의한 후 결국 수개월 혹은 1년 단위로 지원기간을 설정한다. 많은 사회적 기회로부터 떨어져 있던 장애인의 표현 기회를 지원하기에는 이러한 기간 설정이 너무 단기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장애인이 창작을 하는 공간에 익숙해지고 함께 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고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표현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은 일상적 예술하기로 의미화되어야 하는데 그 일상성 확보에는 지속적인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정 중심의 예술하기가 갖는 의미나 가치를 공공적 담론으로 연결할 현장 중심의 연구도 병행되어야 한다. 완성된 기획 프로젝트를 선정하여 예산을 분배하고 1년 단위로 정량적 성과를 정리하는 기존의 지원사업 방식으로는 이러한 시도를 하기 어렵다. 장애인의 삶과 연결된 일상적 예술하기를 위해 제도적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기존 예술계에서 익숙했던 예술의 개념, 창작 방식이나 속도를 전제하지 않는 장애예술‘인’ 중심의 장기적 지원이 현장의 다양한 시도와 함께 펼쳐지길 바라본다.
 
 
 
 
최선영
2007년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개별성 중심의 활동을 기획 및 연구하고 있다. 2018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장애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2021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장애인 비대면 문화예술교육 콘텐츠 개발 사업’, 2022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발달장애인 특성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연구개발’ 등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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