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문화재단
문화매거진 [모양모양] 11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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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삶, 문화예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
최선영 / 문화예술기획자
일상에 새로운 이름이 붙는 시기
“우리 동네에서 경험하는 문화예술[1] 관련 활동은 누구로부터 어떻게 시작되고 어디로 연결될까”
‘지역[2]에서 삶과 연결된 문화예술’이라는 주제로 글을 요청받은 후 지역, 삶, 연결, 문화예술이라는 거대한 개념들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먼저 주제를 일상적 표현의 질문으로 풀어쓸 필요를 느꼈다. 그 개념들은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서 ‘지역문화[3]’라는 정책적 개념과 함께 더 자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기획자, 예술가, 활동가들도 자신의 활동을 이러한 말들로 소개하곤 한다. 이들이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게되면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나 살아가는 방식을 각자의 삶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오히려 낯설거나 너무 소소하게 인식되기도 한다. 동네에서 그림 모임도 하고 마당에서 작은 이벤트도 기획해보고 있는 필자 역시 ‘로컬 크리에이터가 된거냐’, ‘지역문화 활성화 사업을 하고 있는거냐’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내 집 근처에서, 동네 안에서 하는 일상적 활동, 혹은 삶 자체가 시대적 이름을 부여받고 있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2014년부터 시행된 지역문화진흥법과 최근 10년 사이 다양해진 지역별 문화예술 정책 및 사업의 영향도 있다. 특히 지역문화진흥법은 지역 간의 문화격차 해소와 지역문화 다양성의 균형 있는 조화,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 추구, 생활문화가 활성화될 수 있는 여건 조성, 지역문화의 고유한 원형의 우선적 보존 등을 기본원칙으로 두고 있어 생활 단위에서의 문화, 예술 활동을 사회적으로 의미화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아침마다 집 앞 공원에서 달리기 하는 걸 즐긴다, 동네 카페에서 자주 차를 마시며 친구들과 뜨개질을 한다, 주변 지인들과 정기적으로 야외 스케치를 한다 등의 일상은 ‘지역 내 문화예술 활동’이나 ‘생활문화’ 등을 설명하는 작은 단위의 사례들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활동의 주체는 문화예술 관련 전공자나 전문가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취미활동을 즐기는 시민, 새로운 활동을 배우거나 경험하려는 욕구를 가진 사람, 동네 모임을 통해 낯설었던 문화예술 활동을 시도해보려는 누군가 등이 더욱 적극적인 주체로 등장한다. 소수의 전문가나 예술가가 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시대로부터 사회가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삶이라는 조건 위에서의 연결
하지만 지역 별로 사람들의 삶의 조건은 매우 다르다. 문화나 예술이 결국 다양한 삶을 바탕으로 각자의 필요나 욕구, 상황에 따라 시도되거나 발생하거나 심지어 기획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활동의 주체, 삶의 주체를 둘러싼 지역 별 조건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조건이 삶의 환경으로 작용할 때 각기 다른 문화예술 활동, 혹은 양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존의 조건들과 다시 연결되기도 하고 새롭게 생겨난 문화예술 사례들이 서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연결성이 자연스럽거나 유기적일 수 있을지, 그리고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현실적인 질문도 이어진다. 그 질문은 주로 가시적으로 포착되는 문화예술 사례에 집중되지만 우리가 실제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것의 토대가 되는 삶의 조건들이다.
4년 전 수도권에서 충남 지역으로 이주한 필자의 경우도,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이 문화예술에 미치는 영향을 다채롭게 체감하고 있다. 주거 및 교육 환경, 일자리, 소비 방식, 자연 환경, 교통 환경, 문화 시설, 이웃간 소통 방식 등이 지역 내 다양한 조건들로 존재하는데, 그중 예를 들어 공간 관련 조건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수도권에서 30년 넘게 사는 동안 예술가, 기획자로 활동하며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다. 동네 사람들과 워크숍이나 모임을 하려면 결국 비용 문제로 우리만의 공간을 갖기보다 여러 공간을 일시적으로 임대, 대관해야 했다. 상가 건물에 10평 미만의 작업실을 구해도 그 월세를 감당하는 게 한 달 내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의 활동이나 관심사를 하나의 공간에 축적해서 보여줄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컸다.
반면 지금은 소도시 읍내에 살고 있는데 주변에 빈 공간이 많고 임대료도 저렴하다. 서울 한복판 월세와 비교하자면 1/3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주거 공간을 구하는 데에도 수도권에 비해 훨씬 적은 비용이 들고 오히려 넓은 마당까지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공간 관련 현실적 조건들이 변하게 되니 내가 할 수 있는 문화예술 활동의 규모, 내용,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마당에서 워크숍을 열고 동네 공간을 저렴하게 임대해서 모임을 운영하고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활동도 확장해서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수도권의 과열된 부동산 문제라기보다 문화예술에 작동하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들이다. 그중에는 지역이 갖추고 있는 시설이나 시스템도 포함되지만 사람 간의 문화, 소통 방식, 축적된 정서 등도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과를 빠르게 보여줘야 하는 문화가 팽배한 지역에서는 긴 호흡으로 여유를 갖고 진행하는 문화예술 활동이 중심이 되기 어렵다. 반대로 동네 사람들이 서로 농사일을 도우며 느슨한 일상을 보내는 지역에서는 최신의 이슈를 바탕으로 토론과 실험을 이어가는 활동이 큰 공감을 얻기 어렵다. 지역마다의 도시적, 문화적, 사회적, 생태적 조건들이 각기 다른 문화예술의 색깔, 양상, 가치, 뉘앙스 등을 형성하는데 촘촘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조건의 안팎을 서성이는 사람들
그런데 지역마다의 조건이 문화예술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지 않도록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예술가, 기획자, 활동가, 정치가, 사업가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어떤 지역에 문화시설이 적다는 이유 때문에 문화예술 활동이 활발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더 많은 시설이나 공간이 생길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 혹은 시설 대신 작은 커뮤니티를 바탕으로 한 개별적 움직임이 필요해 보이면 지역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활동을 기획하거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은다. 그것은 동네의 소규모 활동이 되기도 하고 프로젝트나 사업 단위로 커지기도 한다. 어쨌든 누군가의 의지나 실천력이 공식화되면 비슷한 관심사, 취향, 가치관 혹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연결된다. 그러면 관련 활동은 규모가 커지기도 하고 정기적인 행사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의 일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사람’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다. 사실상 한계나 문제로 작동하기도 하는 삶의 조건들을 마주하며 그것의 안팎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변하기 어려운 지역적 조건을 오히려 활동의 이유, 기획의 배경으로 전제하고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자연 환경이 풍부하게 살아있지 않은 도시에서 오히려 작은 숲이나 공간을 함께 산책하며 동식물을 관찰, 기록하기도 하고 작은 텃밭을 일구는 커뮤니티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외에 다른 지역까지 관심을 확장하는 경우에는 우리 동네의 이야기를 문화적 콘텐츠로 기획해서 타 지역의 사람들을 초대해 이후의 협력을 모색하기도 한다. 사실상 사람간의 관계맺기, 그것에 대한 의지가 문화예술과 삶을, 그리고 각기 다른 삶을 연결하는 것이다.
지역 외의 영역에서 시도되는 연결
그렇다면 타인의 삶과 연결되고자 하는 누군가의 의지는 지역이라는 행정구역 상의 구획 안에서,혹은 그 사이에서만 주로 작동하고 있을까.
2024년, 현재 사람들은 SNS나 유튜브 등을 통해 온라인에서 문화예술 관련 정보를 더 쉽게 접하고 각자의 표현 기회도 마련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휴대폰에서 검색을 하면 내가 사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문화 소식, 예술가의 활동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고 관련 강의를 찾아 들을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지역 간 문화 격차도 10년 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물리적 범위의 지역 안에서 뿐만 아니라 온라인을 통한 또 다른 레이어에서의 연결을 상상하고 시도한다. 어느 순간 지역이라는 개념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순간도 온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교류할 수 있는 온라인 세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시대적 흐름이 변하는 상황에서 문화예술의 연결성이 작동하는 토대는 지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 피드를 활용해서 온라인에서 퍼레이드를 하는 새로운 방식도 시도되고 개인 방송 채널을 활용해서 일상적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활동도 이루어진다. 그 안에는 문화적, 예술적 요소로 해석 가능한 지점도 많다. 실제로 창작자, 디자이너, 기획자 등이 주요한 역할을 하며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기도 한다.
이것은 지역이 갖는 조건이나 특성을 넘어서는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온라인 상에서 소통이나 연결을 시도하는 누군가가 어떤 욕구, 욕망, 가치관,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타인과의 연결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연결을 의도하거나 연결이 되거나
그렇다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혹은 다른 층위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사람은 왜, 무엇을 연결하려고 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 과정에서 사람은 각자의 의도를 가지고 문화예술을 선택하거나 기획, 배치하기도 하는데 그 목적에 따라 활동의 양상이나 방식은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각자가 ‘연결’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도 중요하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타인과 깊은 고민 나누기, 대화 없이도 정서적으로 연대감 형성하기,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내 관점을 다수에게 관철시키기, 나와 취향이나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 만나기, 구체적인 활동의 동료나 협력자 만들기 등 연결을 무엇으로 전제하는지에 따라 문화예술을 선택하거나 그것에 참여하는 이유가 다각화된다. 그 이유에 따라 여러 현장은 어떤 분위기나 방향성으로 흘러갈까. 목적을 달성하기게 적절한 방식, 장르, 규모, 속도, 수준, 내용의 문화예술이 발생하지 않을까. 실제로 필자가 장애인의 일상적 문화예술 활동을 연구하면서 만났던 현장의 활동가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연스러운 활동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다보니 주로 작은 규모의 그림 그리기, 춤추기, 글쓰기, 악기 연주하기 등을 이어가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문화예술이 삶과 삶,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역시 여기에서도 ‘연결’을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동네에서 어떤 공연이 열렸는데 그것을 관람한 사람들이 각자의 지난 경험을 떠올리며 대화를 나눌 때 서로 연결된다고 느낄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가 단지 개인의 재미에 집중하며 글쓰기 활동을 온라인에서 이어가는데 그것을 본 누군가가 자신도 비슷한 밀도와 방식으로 일상에서 글쓰기를 시도해보기로 마음 먹을 수도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문화예술이 다양한 관계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놀다보니 예술이 되더라, 하다보니 여러 사람이 오더라, 개개인의 관심과 재미가 발동하니 지역의 문화가 생기더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연결하는 사람의 태도와 관점
이러한 두 가지 경우를 고려한다면 삶과 연결될 수 있는 문화예술 안에는 어떤 방향성이 담겨야 할까. 앞선 맥락을 반영하자면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까.
첫 번째, 사람이 문화예술을 선택하는 의도 안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신만을 위한 정치적 행위, 성과 마련, 이익 추구 등을 목적으로 문화예술이 배치될 경우 사실상 그 과정에서는 문화적, 예술적 순간이 발생하기 어렵다. 이때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문화적 경험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각자의 삶에 무언가를 연결하고 싶다는 판단도 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느낀 것이 있어야 일상에서 다른 생각이나 시도도 할 수 있는데 문화예술은 그러한 경험적 기회로서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삶도 고려하고 반영한 누군가의 의도가 선행되어야 문화예술의 가치가 더욱 일상 단위로 이어질 수 있다.
두 번째, 문화예술이 누군가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 개입, 침투될지에 대한 열린 태도가 필요하다. 사람은 어떤 활동이나 사례를 접할 때 각자의 시선과 경험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같은 작품을 보고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반응 혹은 관점이 인정되어야 문화예술의 미세한 요소들이 여러 삶으로 침투될 수 있다. 각각의 요소들은 획일적이지 않은 표현, 시도, 발언, 실천, 질문 등의 형태로 또 다른 삶으로 연결된다. 그 확장 가능성에 대한 인정과 지지가 바탕이 되어야 문화예술의 의미가 더욱 폭넓게 퍼져나갈 수 있다.
결국 삶의 주체, 연결의 고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그 사람의 의도나 태도, 특히 타인을 향하는 관점이 문화예술의 가치나 의미 확장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지역적 상황이나 삶의 조건들이 누군가에게 어려움으로 작동하더라도 그안에서 누군가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문화예술에 대해 얼마나 열린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지역문화’라는 개념마저 등장하고 있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콘텐츠나 사업이 아닌 삶의 태도와 사람을 향하는 문화예술이 더욱 모색되어야 하는 것이다.
[1] “문화예술”이란 문학, 미술(응용미술을 포함한다), 음악, 무용, 연극, 영화, 연예(演藝), 국악, 사진, 건축, 어문(語文), 출판,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및 뮤지컬 등 지적, 정신적, 심미적 감상과 의미의 소통을 목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 또는 타인의 인상(印象), 견문, 경험 등을 바탕으로 수행한 창의적 표현활동과 그 결과물을 말한다. (문화예술진흥법 제2조에 명시된 ‘문화예술’의 정의)
[2] ‘지역’을 도시적, 문화적, 사회적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으나 본 글에서는 사전적 의미(일정하게 구획된 어느 범위의 토지. 또는 전체 사회를 어떤 특징으로 나눈 일정한 공간 영역)로서 지역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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