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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기획] 경기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 매개자 연수 <짓다:살다가> "프로그램을 이겨라"

by 문화예술기획 최선영 2023. 9. 13.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전문인력 매개자 연수 <짓다:살다가>
"프로그램을 이겨라"
 
 
기획 / 최선영
워크숍 / 구은정, 이재환, 조동광
그림기록 / 이려진
사진 / 우에타 지로
진행보조 / 박소정, 박소희
 
 

 
 
 

살다가, 가설을 던져보자면

 
 
최선영 / 문화예술기획자
 
빨래를 탈탈 털어 널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다.
“O월 O일에 OO명 대상의 이런 프로그램 하실 수 있나요?”
문화예술교육(혹은 예술교육)을 ‘의뢰하는’ 누군가의 연락에 프로그램의 규모와 컨셉을 재빠르게 파악해 진행 가능 여부를 답변한다. 초등학생 대상이라고 하면 그동안 만나온 프로그램 속 아이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놀이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문구류 외에 다양한 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지 행정적 절차를 확인한다. 몇 차시로 해내야 하는 문화예술교육인지가 기획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하므로 프로그램의 규모부터 먼저 확인하기도 한다.
그렇게 능숙하게 응답을 하고 난 후 다시 빨래를 턴다. 그러다 떨어진 빨래를 줍는다. 혹시 물비린내가 나진 않는지 빨래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다가 비린내 없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이 참으로 멀끔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내 앞에 쌓인 빨래도 삶도 그다지 말짱하지 못한데 삶을 담아내자고 하는 문화예술교육에는 왜 말짱한 말과 웃음과 ‘만족’이 넘쳐날까, 나 역시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걸까 생각한다. 돈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예술교육은 시간당 얼마를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일감이기도 하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예술을 따라, 일감을 따라, 동료를 따라, 지원사업을 따라, 혹은 다른 무언가를 따라 흘러가고 있다. 그 이야기는 주로 프로그램 밖에서 와글와글 넘친다. 이런 내용을 기획해야 지원사업에 선정될 것 같다, 이 프로그램 끝나고 빨리 아이 데리러 가야 한다, 내년에는 무엇을 하며 살지 모르겠다 등등. 냉소적인 마음이 가득한 날에는 내 귀에 그런 말만 들린다. 어떤 날은 멍한 눈빛 너머, 고요하지 못한 그 마음들을 보고만 있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 매개자 연수’에서 프로그램을 이겨보자고 했다. 프로그램에 지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 혹은 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모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왜 이겨야 하는지, 지금이 딱히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가 궁금할 테지만 프로그램에 내가 지고 있음이 뭔가 꺼림직한 사람들은 ‘무엇으로’ 프로그램을 이길 수 있을지가 궁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획자의 관점과 해석이 온전히 펼쳐질 수 있었던 이번 연수에서 나는 ‘살다가’ 그것을 찾아보자고 했다. 타인의 삶이나 이야기 안에서 끌어올린 ‘주제’가 아닌 문화예술교육을 하고 있는 기획자, 예술가, 강사, 활동가, 실무자의 삶으로부터.
왜냐하면 “문화예술교육은 프로그램이다”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현실 안에서 예술교육가의 삶은 차별화된 기획 주제나 안정적인 운영 역량에 방해가 되는 주변 요소, 넋두리, 혹은 덜 예술적인 무언가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의 삶으로 끊임없이 나아갈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교육이라면 그것과 연결된 개개인의 삶은 귀중한 만남의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교육가도 살다가 문화예술교육‘도’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연수에서 삶 속의 경험을 예술적 표현 행위나 요소로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했다.
하지만 연수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꺼내어 이야기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지는 않았다. 그것이 중요해지는 순간, 정돈될 수 없는 생각이나 마음을 예술교육가들이 소감이라는 이름으로 말끔하게 ‘발표’한 후 그 여운까지도 언어로 결론지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덜 ‘삶적이고’ 덜 ‘예술적이며’ 매우 ‘프로그램적’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연수 참여의 방향성을 매회 강조했다.
 
 

 
 
이것은 프로그램을 이기는 시도로서 매우 중요하다. 현장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시간 안에 적절한 참여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공식화하는 것. 실제로 연수 참여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연수의 내용에 대한 피드백 외에 공통적으로 ‘생각을 빨리 정리해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가 있어서 마음이 편안했고 그래서 각자의 현재 모습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참여의 양상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누군가는 가만히 앉아 생각만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다과를 먹으며 주변 사람들의 참여 방식을 관찰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낯선 활동에 적응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애써볼 수도 있다. 그러한 각자의 참여 혹은 표현은 개별화된 삶의 조건과 흐름 안에서 (기획자인 내가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다양한 모습으로 어느 순간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말이나 글, 콧노래나 혼잣말, 혹은 헛웃음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을 연수가 진행되는 두세 시간 안에 기획자이자 진행자인 내가 참여자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편으로 그것은 내가 참여자를 덜 믿을 때 하는 선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내가 잘 진행하고 있는지, 이 활동이 참여자에게 의미 있게 전달되는지, 함께 한 시간이 어떤 개념이나 의미로 수렴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예술교육가가 자기 자신과 타인을 믿지 못할 때 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당장 반응과 의미를 확인해야 나의 애씀이나 역량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연수는 나도 내 삶에 기대어 조금 더 뻔뻔하고 자신있게 진행했던 작업이었다. 집을 고치다가, 애를 키우다가, 샛길로 빠지다가, 울음을 참다가 경험한 많은 것들 안에 내가 타인과 나눌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구구절절하게 사는 얘기를 했다. 그런 이야기를 담아 만들었던 음악을 참여자들과 함께 들으며 ‘느린 인사’를 나누고 연수를 시작했다. 이어서 ‘토크 같은 강의’라는 이름으로 애 키운 얘기, 강아지 주워온 얘기, 시골집에서 천장과 벽을 뚫어본 얘기, 가난한 게 싫어서 일에 매진해본 얘기 등을 쏟아냈다. 분명 강의는 아니었는데 한편으로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입장이나 상황에 대해’ 사는 얘기를 하는 것 외에 어떤 강의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후에는 ‘기승전결 없는 워크숍’과 ‘이제야 수다’를 푸짐한 다과와 함께 했다. 그러니까 토크 이외의 시간에는 자유롭게 자신의 참여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30분 동안 다과를 먹고 20분 쉬고 30분 정도 워크숍을 할 수도 있었고 누군가는 1시간 넘게 워크숍만 하다가 다과를 포장해서 갈 수도 있었다. 참여자의 선택 범위를 넓히는 것은 덜 프로그램적이고 싶었던 시도 중 하나였다.
 
 

4일간의 연수 활동

 
 
네 번의 만남 동안 우리가 나눈 것은 삶의 몇 가지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문화예술교육에서 타인과 만나 나눌 수 있는 것이 저 멀리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안에 이미 있다는 것. 그것을 감각하고자 했다. 그래서 어떤 장르를 전공하거나 문화예술교육을 더 많이 공부한 누군가가 더 잘 할 수 있는 예술의 문법 혹은 문화예술교육의 방법론을 중심에 두지 않았다. 그것을 학습하는 것을 연수의 목적으로 설정했다면 예술은 계속 더 높고 먼 곳에서 반짝거리며 스스로 그 아우라에 기대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술마저, 사람들의 하루하루로부터 멀리 떨어져 빛나고만 있다면 문화예술교육 안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삶 안에 이미 예술적인 것, 문화적인 것이 넘쳐난다고 전제한다면 예술교육가는 자신의 삶을 더욱 들여다보게 될 것이고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가까운 곳에서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주장이자 가설이다.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의도에서 이번 연수도 진행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나도 ‘살다가’ 연수라는 ‘프로그램’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빨래를 널다가, 돈을 벌다가, 분리수거를 하다가, 불안함에 손톱을 물어 뜯다가 예술도 하고 문화예술교육도 하며 살아간다. 그때, 빨래를 곱게 널어놓고 몇 년 전에 만들어 둔 파워포인트 자료를 꺼내어 예술에 대해 읊는 것은 덜 예술적이기 전에, 나를 살아있게 만들지 않는다. 그런 순간은 단지 적당하고 적절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진행자만을 남긴다. 교육 참여자를 위한 문화예술교육 서비스맨을 만들기도 한다. 현실적인 이유로 나도 진행자나 서비스맨이 되어야 하는 경우도 많지만 언제나 그럴 수만은 없다. 나로 살아가기 위해 제도는 할 수 없는 나의 선택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교육도 살다가 하는 선택 중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교육가의 얼마나 다양한 선택들이 현재 문화예술교육 안팎에서 등장하고 있을까. 어떤 가설과 주장이 맞부딪히고 있을까. 충돌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 목소리들은 뜨겁게 살아있을 수 있을까. ‘살다가, 프로그램을 이겨보자’는 외침은 다른 목소리의 등장도 응원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나는 이 징글징글한 삶으로 프로그램을 이겨보려고 하는데, 당신은 무엇으로 이겨보려 하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여전히 삶 외에는 강력한 도구 혹은 무기가 떠오르지 않는 입장에서, 보편적 대안이 아니라 개별화된 주장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이겨보자’는 말은 하나의 제안이 아니라 열린 질문이기도 했다. 나의 가설과 나란히 구호를 외칠 다른 가설을 향해. 깜빡하고 널지 못한 빨랫더미에서 물비린내가 스물스물 올라올 때 나는 시를 쓰지 않아도 시를 닮은 마음이 떠오르는데, 당신은 무언가로부터 예술을 떠올리며 문화예술교육도 하고 있는가. 이 열린 질문은 닫힐 것만 같은 마음을 애써 부여잡으며 오늘도 누군가의 외침 혹은 질문을 기다린다.
 
 

 
 
 
 
 
 
 
그림기록
 
 

 
 
 
 
홍보 영상
 

 
 
 
 
기록 영상 1
 

 


기록 영상 2
https://youtu.be/npG-HikpiNM?si=OOcPRSeFNXbrNg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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