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모두예술주간 2023
사전 프로그램
'앨리스 폭스의 포용적 예술'
모두예술주간 2023 홈페이지
https://2023.dawis.kr
사전 프로그램 (2023.6월)
한국의 발달(학습)장애인의 창작 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발달장애인의 창작활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읽어내는가? 이 때 창작활동은 어떤 조력과 매개로 이루어지는가?
한국 내 발달장애인 창작 현장에서 활동하는 매개자, 예술가와 앨리스 폭스가 학습 장애인과의 협업, 그리고 이를 통해 좋은 창작을 이끌어내는 ‘포용적 예술’ 방법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용어 너머의 공통 지대를 발견한다. 다양한 창작 현장을 찾아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발달장애인 예술활동의 현재 좌표를 살피고 나아갈 방향을 탐색한다.(출처: 모두예술주간 2023 홈페이지)
프로그램 참여 : 앨리스 폭스
모더레이터 : 최선영 문화예술기획자
프로그램 세부 내용
포용적 예술 논의
– 발달(학습)장애인의 창작 활동 조력자(매개자) 중심으로 (참여 : 김인규, 김진우, 이희원, 정지성)
– 발달(학습)장애인 협업 예술가 중심으로 (참여 : 김지영(109), 신재)
– 창작 주체의 일반성에 대한 질문 (참여 : 김다은, 손한샘, 옥민아)
한국 내 창작 현장 탐방
– 탐방 단체 : 창작스튜디오 틈, 피터팬클럽, 발달장애청년허브 사부작
모더레이터 노트
최선영 / 문화예술기획자
대화의 수단으로 활용된 ‘포용적 예술(inclusive art)’
국내에서는 ‘inclusive art’가 ‘포용적 예술’로만 번역, 사용되면서 폭넓은 논의보다는 누가 무엇을 포용하는가, 이러한 관점이 장애, 비장애에 대한 동등한 관계 설정을 만들 수 있는가 등 질문이 이어져 왔다. 이것은 ‘장애예술’로 표현되는 국내의 흐름이나 움직임을 다른 이름으로도 부르고자 하는 의도 때문인데 ‘장애예술’을 타국의 사례를 바탕으로 ‘포용적 예술’로도 부를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워크숍에서는 이러한 논의보다 확장된 관점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inclusive art’는 대화의 주제나 최종 검토 요소가 아니라 논의를 시작하는 수단이 되었다. 여러 이름과 의도로 이어져 온 국내외 사례를 나누기 위해 하나의 개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화의 진행자였던 필자는 이 개념이 국내에 번역된 몇 개의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열려 있고 유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inclusive’가 갖는 다층적 의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의미가 어떤 사회적 상황, 삶의 여건, 예술관 안에서 해석되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앨리스가 말하는 관계성, 커뮤니티성, 예술성 등도 국내 상황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어 보였다.
특히 앨리스는 한국이나 영국의 다양한 예술적 움직임이 반드시 ‘inclusive art’로 불릴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기존의 지배적인 관점이나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로도 들린다. 단지 장애와 관련된 다양한 예술적 움직임을 사회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각자의 상황과 필요에 맞는 이름이나 개념을 찾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앨리스는 논의 과정에서 자주 ‘이러한 활동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설득의 방법을 예시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것은 ‘inclusive art’ 자체의 의미보다 이러한 개념을 등장시키려는 의도나 의지가 더욱 중요함을 보여준다.
표현할 권리
첫 번째 워크숍에는 학습장애(발달장애)를 가진 창작자와 그의 조력자(매개자)가 대화에 참여했다. 창작자와 매개자의 관계는 모두 자녀와 부모의 관계였다. 부모의 개입이나 지원이 특히 발달장애 창작자의 일상적 활동이나 삶의 지속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내 상황이 반영된 자리였다고 볼 수 있다. 발달장애인과 (가족이 아닌) 예술가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결국 부모나 가까운 가족의 영향력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창작자는 일상에서의 활동을 소개하거나 보여주었고 매개자는 그것을 바라보거나 함께 하는 입장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매개자는 창작자가 자기답게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리가 사회적으로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학교 미술 활동 중에 비장애인 교사가 반제품 작품을 대신 만들어주는 상황, 발달장애인이 각자의 표현 욕구가 있음에도 봉투를 접는 등 단순노동을 하며 성인 시기를 보내야 하는 상황, 발달장애인의 표현 행위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현실 등에 대한 구체적 언급도 있었다.
결국 ‘inclusive art’가 필요하다, 그것은 어떤 방법론으로 발달장애인에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환경이나 인식의 변화에 대한 깊은 공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작자와 매개자는 누구든 각자의 욕구와 속도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사회 전반에서 공감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권리, 그래서 예술교육?
앞선 논의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표현의 권리’로 인식된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발달)장애인의 자기표현 일상화에 대한 논의가 쉽게 예술교육 참여 기회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발달)장애인의 다양한 예술교육 기회가 워낙 부족하다 보니 이러한 논의 전개가 현실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예술교육의 목적이나 방향성에 대한 담론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주로 (발달)장애인은 프로그램 이용자나 교육 대상으로 위치되고 변화나 성장, 예술적 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한 교육활동 및 제도가 마련된다. 이것은 (발달)장애인 예술교육이 주로 장애 예술가 양성으로 흐르는 현상과도 관련이 높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질문부터 다시 해볼 필요가 있다.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자기표현 기회를 넓히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무엇이 필요할까. 아마도 예술교육(이라 불리지만 사실상 프로그램)의 참여 기회 확대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것, 경험하고 싶은 행사나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참여할 수 있는 것, 만나고 싶은 사람과 자유롭게 만나며 요즘의 관심사를 나눌 수 있는 것, 이러한 일상적 토대 위에서 하고 싶은 것은 해볼 수 있는 구체적 자리가 마련되는 것 등 폭넓은 접근이 가능하다. 앨리스가 말하는 ‘inclusive art’ 역시 특별한 프로그램의 기획이나 제공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일상에서 하던 활동(이번 워크숍에서 김진우 창작자가 휴대폰에 투명 테이프를 감는 행위와 같은)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표현을 통한 상호성, 관계성, 연결성
‘inclusive art’를 두고 이어진 네 번의 워크숍에서는 사람 간의 포용, 존중을 중심으로 대화가 연결되었다. 첫 번째 워크숍에서 매개자인 김인규 작가는 타인과의 관계 형성이나 삶의 연결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특화된 프로그램이나 공간이 기획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존재가 함께 살아가는 환경이라는 의미다.
세 번째 워크숍에서 백구 작가는 발달장애 창작자와의 협업 과정에서 변화되어 가는 본인과 창작자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자신의 역할을 재설정하기도 했고 퍼레이드 작업을 통해 다양한 존재들이 단순한 행위를 함께 하는 것 자체의 의미를 강조했다. 같은 워크숍에서 신재 연출가는 예술 활동의 사례를 특히 장애, 비장애인의 협업에 초점을 맞춰 언급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로 마음의 긴장감이 풀리고 신뢰가 생기는 시간이나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이야기했다.
결국 이러한 논의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특성이나 표현 방식을 포용해야 한다는 관점이 아니라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서로 간의 관계 맺기가 중요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상호적 관계로 해석되는데 ‘inclusive art’에서 특히 협업을 중요한 방법론이자 형태로 언급하는 것과도 관련이 깊다. 실제로 앨리스는 ‘inclusive art’는 작품이나 개인을 향한 불특정 다수의 포용력이 아니라 사람 간의 상호적 태도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런 내용은 논의에서 ‘커뮤니티’라는 표현과도 연결되어 자주 등장하였다. 이것은 예술적 재능을 가진 소수의 장애인에 대한 집중된 관심이 아닌 다양한 존재들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커뮤니티‘적’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단지 국내에서는 이 ‘커뮤니티’가 장애인 부모회, 예술 단체, 아트센터, 창작스튜디오 등 고정된 조직이나 모임으로만 좁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 이에 대한 현실적 논의는 추가로 필요하다.
무엇으로 연결되는가
네 번째 워크숍에서는 ‘inclusive art’가 비장애인, 전문 예술인 등을 중심으로 일반화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창작 주체의 일반성에 대한 질문’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는 기획자들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국내의 지원제도 기준에서 일반화된 예술 활동의 속도나 방식, 경력 등에서 벗어나 있는 창작자들과 협업을 이어왔다. 그런데 이 논의에서는 장애 이외의 주제로 뻗어나가 대화를 나눴는데 오히려 다른 워크숍에서 중요하게 거론된 관계성, 연결성, 상호성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였다. 창작 주체의 조건이나 상황이 일반적일 수 없다는 공감이 창작자들의 다양한 고민, 어려움, 정서에 대한 논의까지 이어져 대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돌봄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 개인의 미래나 사회적 위치에 대해 불안해하는 사람, 빠른 속도로 경력이나 성과를 만들기 어려운 사람 등의 입장이나 감정이 오히려 인간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 장애는 일부 요소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요소들이 연결될 때 오히려 강력한 연대감이 발생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작자들은 예술적 재능이나 뛰어난 성과를 통해 연결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의 부족함, 소수성을 매개로 동질감이나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서로에게 공감받을 때 각기 다른 사람들은 더욱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협업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창작자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전제하니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도 들여다보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결국 그 차이는 다수의 존재가 등장하여 관계가 형성되어야 인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여러 협업의 의미가 부각되기도 했다.
필자는 장애에만 집중하지 않았던 네 번째 논의가 장기적으로 국내의 담론에 중요한 방향성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논의에 등장한 개별화된 삶이 결국 사회를 다층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렌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장애는 개인의 문제나 조건으로만 개념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나 구조 안에서 규정되는 측면이 크기 때문에 사회를 여러 시선으로 살펴보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특히 사회 전반에서 어떤 관점이나 인식이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그 안에서 개별적 삶은 어떤 속도와 정서로 흘러가고 있는지 폭넓은 대화도 필요해 보인다.
그럼에도 낯설고 불확실한 것은 어렵다
위와 같은 논의나 문제의식이 사전 워크숍 같은 현장의 대화에서는 큰 공감을 받지만 사회 전반의 인식과는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확실하고 선명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발달장애인이 도화지에 그림을 열심히 그리다가 성인이 되어 미술작가가 되었다. 혹은 그럴 수 있으니 미술 교육 프로그램과 전시 지원제도를 확대해야 한다”라는 말은 너무나도 확실한 상을 보여준다. 반면 발달장애인이 각자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표현 활동을 한다는 것, 그것이 너무나도 개별적이라서 일단 그것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등장해야 한다는 것, 이와 관련된 개별 창작과 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며 논의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결론은 보편적 지원 모델로 수렴될 수 없다는 것 등은 낯설고 불확실한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사전 워크숍 내내 등장한 이야기들은 이러한 내용들이었다. 이번 대화에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그것이 더욱 분명한 고민과 시도들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잠시 확실한 것을 말해야 할 때의 ‘inclusive art’
국내에서는 발달장애인의 불안정한 삶으로 인해 오히려 확실하고 일반적인 방편으로 예술이 기능하기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크다. 하지만 예술은 다른 분야에 비해 낯설고 불확실한 것을 담아내기에 가장 적절한 그릇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 아닐까. 앨리스가 말하는 ‘inclusive art’ 역시 이러한 열린 해석, 유연한 그릇의 일부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 예술에 대한 좁은 해석이 일반화되는 상황에서 ‘inclusive art’가 불확실한 예술 행위에 대한 공식적 언어 중 일부로 해석되어 권위가 부여된다면 국내의 논의가 예술에 대한 넓은 범위의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서 ‘권위’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 이것은 장애예술에 특별한 권위, 높은 지위에 필요하다는 주장과는 다르다. 현재 국내에서는 장애인의 낯선 창작 활동, 혹은 다양한 존재들의 협업 활동이 예술 영역에서마저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의 자립에 수단이 되는 확실한 방안, 직업군 개발에 도움이 되는 블루오션처럼 예술이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예술마저 분명한 것들의 자리매김을 위해 사용된다면 불분명하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활동들은 사회 안에서 어떻게 각자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측면에서 ‘inclusive art’는 불확실한 순간들을 적극적으로 호명하기 위한 일시적 언어이자 권위 부여의 수단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용어 선택의 적정성에만 집중하기 전에 국내의 예술이 어떤 토대 위에서 다른 언어나 움직임을 마주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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