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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글] 닿을 수 없는 것도 남겨진

by 문화예술기획 최선영 2024. 6. 24.

2024 아르코미술관x지역문화재단 협력기획전
<여기 닿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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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출판 2024 아르코미술관×지역문화재단 협력 주제기획전 《여기 닿은 노래》 텍스트 웹도록 발행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발행일 2024년 6월 필진 김미정, 정현, 최선영, 서평주, 문영

www.arko.or.kr

 

 


📍목차
2 거기 늘 있던 노래
—김미정(아르코미술관 학예사)

6 장애의 시간과 그 너머의 시간들
—정현(미술비평, 인하대학교)

12 닿을 수 없는 것도 남겨진
—최선영(문화예술기획자)

16 시행착오와 참조점
—서평주(작가)

21 장애의 감각으로 미술관에 가까이 닿다
—문영민(선임연구원, 서울대학교 보건환경연구소)
 
 
 
 

닿을 수 없는 것도 남겨진

 

최선영(문화예술기획자)

 
제도권 협력으로부터의 시작
아르코미술관은 현대미술 패러다임을 이끄는 공공미술관으로서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공간(각주1)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르코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는 제도라는 커다란 범주 아래 시대적 이슈나 움직임을 미술의 언어로 포착해 제도권 안에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전시 《여기 닿은 노래》(2024) 역시 최근 장애인의 예술하기와 관련한 사회적, 정책적 움직임이 커지면서(각주2) 아르코미술관과 지역문화재단이 협력하여 개최한 기획 전시이다. 지역문화재단에는 광주문화재단, 부산문화재단, 서울문화재단이 참여하였는데, 이 공공기관들은 장애예술 관련 지원제도를 공간 사업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획 배경을 고려했을 때 이번 전시를 장애예술과 관련한 기획으로만 해석하는 관점은 한계가 있다. 지역문화재단들이 주목해서 지원하는 예술가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창작 활동을 고려하며 전시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여러 지역에서 장애예술을 지원하는 제도가 본격화된 최근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공공 영역에서 다양한 존재와 예술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그 자체로 기관의 사회적, 공공적 역할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공공기관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기에 기획 초기 단계에서부터 제도권 미술이 호명할 수 있는 대상을 전시 참여자로 전제하였다. 지역문화재단의 지원을 받는, 즉 지원제도 안에 진입할 수 있는 장애예술인의 참여를 적극 고려하게 된 것이다. 이 역시 현실적인 기획의 흐름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역문화재단이 주목하거나 관계성을 갖는 예술인이 지원제도 내에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인지 질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제도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장애인 범주 내에서는 더욱 그렇다.
 

각주1) 아르코미술관 홈페이지 소개 글.
각주2)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제1차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향후 5년간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정책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였다. 2023년에는 장애예술인 작품발표 기회 확대를 골자로 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장애예술인 창작물 우선구매 제도」도 시행되었다. 또한 국내 첫 장애예술인 표준공연장 ‘모두예술극장’이 개관하는 등 장애인의 문화예술활동 관련 공공 지원이 본격화되고 있다.

 
제도권 미술 안팎의 시도
이러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아르코미술관 바로 앞 마로니에 공원에서 끊임없이 장애인의 존재와 권리를 외치는 목소리가 미술관에 닿으면서 이번 전시 기획의 맥락을 넓혔다. 이에 따라 지역문화재단이 제도 안에서 만나온 장애예술인 외에 다양한 주체들이 장애유무와 상관없이 전시에 참여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전시는 개별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 외에도 얼마나 다양한 맥락 안에서 참여 작가가 결정되고 섭외되었는지,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시를 준비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술관은 충분히 쉽고 편리한 선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역문화재단으로부터 추천받은 작가‘만’이 전시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전제로 전시를 구성하는 선택 말이다. 이는 공공기관 간 ‘협력’ 전시라는 타이틀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택이기는 하지만, 동시대 다양한 목소리와 패러다임을 보여줘야 하는 공공 미술관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전시는 제도권 미술 안팎의 다양한 창작자와 작품의 존재도 함께 고려한 전시라 볼 수 있다. 짧은 기획 기간에 매우 낯선 표현 방식이나 주체를 찾아 그것을 전시 언어로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아르코미술관은 조금이라도 다른 시도를 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이분하거나 ‘다른 몸’에 연민이나 특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아울러 장애예술, 배리어 프리(Barrier-free) 등의 언어에 의지하는 대신 자신만의 독특하고 다양한 언어를 지지체로 삼는 작품들을 들여다보고 이를 관람객에게 소개하였다.(각주3) 전시 정보를 안내하는 게시물이나 인쇄물 등에 지역문화재단과 관계된 참여 작가를 별도로 구분하지 않은 점, ‘협력’의 범주 안에 지역문화재단명만 명시한 점도 그 시도와 노력의 일부로 해석된다. 또한 삶의 교차성이 드러나는 과정형 작품, 자신의 기존 작품과는 다른 방식의 보여주기를 시도한 작품, 단체나 커뮤니티가 오랜 시간 이어온 공동의 움직임이나 사례 등을 전시, 오프닝 공연, 그리고 연계 프로그램 안에 적극적으로 등장시켰다. 이제 공공 영역의 역할은 장애, 다양성, 다름 자체를 다루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승인과 이해’(각주4)를 전제로 개별화된 표현과 목소리를 보여주는 것임을 실천한 것이다.
 

각주3) 《여기 닿은 노래》 전시 서문 중.
각주4) 《여기 닿은 노래》 전시 서문 중.

 
제도권 미술을 둘러싼 협력의 방식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전시의 기획 배경을 되짚어 보면, 공공기관 간 협력이라는 구조로 인한 한계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는 비단 이번 전시의 한계라기보다 제도권 내 기관 간 협력 구조 자체에 내재하는 한계로 볼 수 있다. 기존의 운영 구조와 소통 방식을 유지하는 공공기관이 그동안 중심에서 밀려난 이야기나 행위, 존재를 보여주는 방식을 새롭게 모색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이 중심이 되는 협력의 구조, 방법, 속도, 관계자의 역할 등은 그 목적이나 내용과는 무관하게 일관성을 유지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있다. 현장에 필요한 새로운 선택을 적용하기 어려운 구조도 있고, 애써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도 있다. 시간과 여유가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실험이나 시도는 더욱 먼 선택지가 된다. 어느새 협력이나 연결, 성과보다는 그 방식의 무탈함이 더 중요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협력을 통해 전시에 담아내려 했던 주제 이전에 협력이 이루어지는 방식 자체가 전시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때, 협력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이 기획되기보다는 기존의 운영 구조 위에 ‘협력’이라는 과제가 추가되기도 하는데, 기존 구조는 크게 바뀌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예술의 일반성에 닿은 질문
그럼에도 이번 전시를 통해 할 수 있는 질문은, ‘기존 협력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공공기관 간의 협력 외에 현장을 염두에 둔 어떤 협력이 시도되었는가?’이다. 왜냐하면 이번 전시에서는 예술의 일반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정 신체나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만이 예술계에 접근하거나 진입할 수 있었다면, ‘다른 존재나 목소리, 움직임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아르코미술관에 ‘지금, 닿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방식으로 전시를 상상하거나 전제하지 않아야 하고, 예술계에 편리한 방식으로 전시를 준비하지 않아야 한다. 공공기관들의 협력이 준비 과정에 있어 주요한 것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협력의 방식도 기존과 달라져야 한다.
물론 전시 자체로 그 과정을 면밀하게 살피기는 어렵다. 단지 기존과의 ‘다름’을 보여줘야 하는 시대적 흐름과 사회적 필요 안에서 공공 영역의 역할이 얼마나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공동의 논의가 필요하다. 창작을 하고 작품을 보여주는 예술가, 그것을 초대하고 지지하는 미술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운영적인 측면 외에 협력하는 공공기관의 구조가 특히 이번 전시에서 특징적인 부분인데, 각자의 역할에 있어 참조할 수 있는 ‘기존’의 기준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도 질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보여주고, 협력하고, 혹은 무언가 시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도권에 닿음, 그리고
장애예술이라 불리는 영역은 이러한 시도를 끊임없이 제도권 안에서 이어가고 있다. (‘장애예술’ 또한 정책이 만들어낸 말이다.) 이번 전시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첨예한 움직임과 이야기가 제도와 함께, 혹은 제도 안에서 발언의 자리를 찾는 것은 사회적 논의 및 표현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제도에 비대한 힘이 형성되면 제도의 목적과 기회들이 현장에서 방향이나 방법을 제시하며 앞서 나가기도 한다. (이번 전시가 장애예술에 대한 전시만은 아니지만) 장애예술의 맥락으로도 충분히 해석 가능한 지점이 있는 ‘제도권’ 사례들은 그것이 거대하거나 명확할수록 이러한 위험 요소를 더 내포하게 된다. 더 많은 예산, 인력, 공간, 연결망, 사회적 파급력을 가지는 제도권의 움직임이 ‘제도에 닿은’ 무언가를 제도의 방식과 언어로만 다시 ‘현장에 닿게’ 퍼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역시 이러한 가능성 안에서 그것과 거리두기를 얼마나 시도하였는지가 중요한 논점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미술관에만 해당하는 내용 같지만, 사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사람, 관계하는 사람, 장애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모두에게 남겨진 질문이다. 어떤 목소리가 ‘드디어’ 노래가 되어 미술관에, 예술계에 닿았고, 그 모습을 풀어내는 자리에 많은 에너지와 자원, 그리고 관심을 쏟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모습은 현장에 어떤 인상, 신호, 질문, 목소리 혹은 욕망으로 닿고 있는가? 지금 현장에서는 어떤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가? 그 목소리는 현재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와 맥락으로 포착되고 있는가, 혹은 사라지고 있는가?
 
 

아르코미술관에서 바라본 마로니에공원 (필자 제공)

 
 
함께 만들고 질문하는 기회
공공 영역에서 예술을 토대 삼아 할 수 있는 역할 중 하나는 공식화된 창작 활동이나 결과물을 매개로 사회적, 정치적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작품 발표의 기회를 얻기도 하고 창작 활동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그 범위나 규모를 넓히는 것만이 공공 영역의 역할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측면에서 공공 미술관과 지역문화재단의 역할을 스스로 질문하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점점 거대해지고 다양해지는 장애예술 관련 기획 사업이나 사례들 속에서 현장의 예술가들은 오히려 제도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각자의 시도를 했으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장애예술인 본인을 보여줘야 하는지, 장애를 보여줘야 하는지, 작품성을 보여줘야 하는지, 혹은 보여주는 것 자체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하는것인지 등 여러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전시장 안에 펼쳐진 개별성들이 한눈에 들어올 때쯤, 예술가들은 다음에 더 단단해지기 위한, 혹은 더 멀리 도망가기 위한 다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몇 년 사이 자신을 더 많이 호명하고 초대하는 제도권 미술 안에서 각자의 줄다리기를 이어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개인의 고민이 지속되어야 누군가의 노래가 어딘가에 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하지만 누군가에게, 미술관에, 제도에, 사회에 닿지 않는 목소리나 노래, 존재도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여러 형태와 방향으로 쪼개어 퍼진다. 이름 없는 행위, 개념화되지 못하는 움직임, 의미를 획득하기 어려운 표현,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존재 등이 있다. 그것은 어딘가에 닿을 수 없는 상태로 지속되기도 한다. 혹은 닿지 않아도 상관없음을 향하는 선택도 있다. 잔인하게도 그것이 가장 예술적일 때도 있다. 미술관에 닿을 수 있는 것만이 예술은 아닌 것처럼. 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가장 실험적인 노래가 되는 것처럼.
그런 측면에서 바라건대, 이번 전시가 제도권 미술에 무엇이 닿았고 닿을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사례로만 해석되지 않아야 한다. 전시 제목의 ‘여기’가 가리키는 것이 장애예술인에게 거대한 목표점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닿을 수 있는 것의 조건 속에서 여전히 예술의 일반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닿을 수 없는 것들 속에 무엇이 살아있는지 등의 질문이 필요하다. 제도가 깃발을 들고 앞서나가는 상황이 감지될수록, 제도권 미술에 결국 많은 것이 닿아버리지 않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야 한다. 기존의 세계에 닿지 않는 것이 끊임없이 남겨질 수 있어야 그것이 더 넓은 예술의 지대를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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