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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글] 한진하 개인전 <기억하는 일_기억하는 것과 아는 것>

by 문화예술기획 최선영 2023. 11. 21.


한진하 개인전
<기억하는 일_기억하는 것과 아는 것>


• 2023.11.21(화)-12.05(화)
  (12:00-19:00 I 매주 월 휴무)
• 인천시 부평구 부평대로 38번길 22, 2층 아트스페이스 실




떠밀려가지 않기 위한 절차

 
최선영 / 문화예술기획자
 
 
눈금은 일정하고 정확하다. 한 칸, 두 칸, 숫자를 세는 인간 세계의 규칙을 따라 칸을 계산하고 채우면 그 정확함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일정하고 그에 따른 계산법도 명확하기 때문에 그 기준에 기대어 모호한 것도 덜 모호하게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표현된 것이 그러할 뿐, 표현하려고 했던 무언가의 모호함이 눈금의 정확함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기준과 방법이 분명하다고 해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는 것처럼.

작가는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정확하고자 했다. 기억 속의 장소, 그곳의 이미지, 그 순간 보거나 기록했던 무언가에 대해 정확하고자 했다.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정확하게’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래서 모눈종이처럼 일정한 규칙이 깔린 바탕 위에 자신이 ‘본 것’을 그리기도 했다. 그와 관련된 경험이 작가에게 심리적, 정서적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질문도 생기지만 여기서도 다시 작가가 지난 기억을 마주하는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느낀 것, 혹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본 것’에 집중한다. 마음에 일렁이는 잔상이 아닌 눈앞에 있는 현상에, 그 현상을 마주하는 절차에 집중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감정적 필터를 거쳐 즉흥적,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이미지와 거리를 둔다.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변형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기억의 장소도 직접 가보고 더 정확할 수 있는 기준들도 화면 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보고 있을까’, ‘나는 정확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장소로서 예술을 활용한다. 직선과 직선 사이에서 흐트러짐 없이 각자의 위치를 찾는 이미지들, 그 가운데 자신의 호흡으로 서 있으려는 작가가 보인다. 애쓰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감성적 해석이다. 작가는 노력을 통해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현재 자신에게 지나가고 있는 순간을 온전히 마주하려고 할 뿐이다. 지나가고 있는 것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고 싶을 때는 눈금 위에 그것을 그리기도 하고 패턴으로도 표현해 본다. 이미 지나간 것들이 흐릿해지면 아련한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기보다 지금 보이는 흐릿함을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이 현재를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흘러가다 마주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표현의 방식을 설계한다. 공식을 만들 듯이. 본 것을 표현하는 과정 안에 작가의 공식이 여러 의도와 공정으로 배치되어 있다. 특정 재료를 선택하거나 울퉁불퉁한 이미지의 외곽선을 매끄럽게 다듬거나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하거나.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너무 뜨겁거나 따뜻해지는 서사 대신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작동하도록. 공식은 단순하든 복잡하든 하나의 질서를 갖는다. 그래서 어떤 변수가 들어가도 그 질서 안에서 결괏값을 만든다. 흔들리는 사람이 만든 질서도 정확한 규칙만 갖추고 있다면 흔들리지 않고 결괏값을 내놓을 수 있다. 윤곽이 분명한 값을. 그것은 작가의 작품 제목처럼 기억을 포장하거나 패턴화 하는 방식, 그 결과물로서의 작품의 표면과도 닮아있다. 이렇게 딱 떨어지게 기억을 표현했다고? 다시 그 표면의 미세한 떨림을 찾으려 작품 가까이 눈과 코를 갖다 대본다. 하지만 어떤 재료를 선택한 이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한 맥락, 그것을 재구성한 의도 등이 더욱 촘촘하게 읽힌다. 흔들리는 손끝도 마음도 그 공식 안에서 가로, 세로의 약속을 따라 다시 줄을 서고 중심을 잡는다.



작가가 그렇게 무언가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어떤 기억이나 경험으로부터 스스로 정확해진다는 것은 가능할까. 작가는 그것의 불가능함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능 여부가 작업에서 중요한 동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한 것들의 선택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그리고 불규칙하게 들이닥치거나 잠잠하게 밀려온다. 그때 정리된 의도나 목표를 가지고 흘러들어오는 사건들에 대처를 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그 일들이, 그 손에 잡히지도 않는 공기 같은 무언가가 나를 관통하는 것을 겪는 수밖에 없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의 속성과 범위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계속 살아간다. 시간이 흐른다. 지나갔다고 여겨졌던 일들이 공기 중 일부가 되어 몸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숨을 쉬다가 문득 그 일들이 나를 살게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날도 있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순간들을 ‘기억’이라고 부르게 될 때쯤 스스로 거울을 만들어 그 기억을 마주해 본다. 어떻게 생긴 녀석일까, 지금 얼마큼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작가의 작업은 그 거울 속에 비친 무언가처럼 보인다. 여러 의도와 이유들로 설계된 공식들은 작가가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 만든 거울 같기도 하다. 그래서 관객이 작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시선 대신,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더 궁금하다. 지금, 무엇이 어떻게 보일까.

한동안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집중했던 작가에게 지금은 무엇이 더 보일까. 혹은 더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이 더 보고 싶어 졌을까. 지금의 거울 뒷면에서 다음 거울을 만드는 것이 미술(계)의 문법으로만 읽히지 않도록 예측하기 어려운 공식이 계속 생겨나기를. 공식이 발명되어 나열되는 순간보다 재채기처럼 툭 튀어나오는 순간이 더 많아지기를. 그러다 공식에 넣을 수 없는 변수 덩어리도 발견되기를. 질서 정연하지 않은 삶들이 오늘과 내일에게 밀려올 때 작가의 중심 잡기가 여러 거울로 등장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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