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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면 읽히겠지

[쓰다 보면 읽히겠지] 15. 불안함을 달래는 예술 안내문

by 문화예술기획 최선영 2025. 4. 18.
<쓰다 보면 읽히겠지> 
 
나는 혼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문화, 예술 관련 공공 프로젝트나 사업 기획을 하기도 한다. 창작, 기획, 문화예술교육 등을 주제로 강의나 컨설팅을 하기도 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과 마주 앉아 회의도 많이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나 강아지들과의 산책 길에 여러 생각을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과 상상과 심정을 가로지른다. 나는 그 흐름을 글로 옮겨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 문화예술 분야의 질문이 특정 사업이나 제도, 이슈에 대한 한정된 논의로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의 삶은 여러 차원으로 연결, 교차되기 때문이다. 웹진이나 자료집 원고, 사업 보고서에는 담기 애매하지만 분명하게 떠오르는 현재의 질문을 계속 펼치고 싶다.

 
 
 
 

쓰다 보면 읽히겠지 15.

"불안함을 달래는 예술 안내문"

 
 
"그래서 11월 프로그램에서 결과물이 어떤 형태로 나오나요? 그걸 아이들이 집에 가져갈 수 있나요? 재료는 뭘 쓰나요?"
몇년 전 유치원에서 1회성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봄부터 11월 프로그램에 대한 담당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그 사람은 전화로 재료, 방법, 결과물의 크기와 형태까지 반복적으로 물었다. 아이들이 한 두 시간 재료만 만지고 놀아도 충분할텐데 왜 계속 다른 요소만 궁금해하는 걸까. 그리고 ‘반드시' 아이들이 결과물을 하나씩 집에 들고 가야 한단다.   
예술교육가가 참여자와 그의 표현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표현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을 신경 쓰는데 에너지를 더 쓰게 된다. 예술교육가의 공간이 아닌 다른 기관이나 시설에서 무언가를 해야 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참여자가 미성년자이거나 언어적 표현이 어려운 경우에는 관계된 실무자나 보호자의 욕구, 관점이 현장에 끊임없이 개입된다. 이런 경험이 수년간 지속되니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 예술활동이 많은 사람들을 왜 불안하게 하는 걸까' 질문이 생겼다. 그래서 일단 그 상황과 관련된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사실 그것은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유치원에 특별활동 비용을 내고 있는 보호자가, 비용 대비 너무 결과물이 없는 낯선 활동을 목격하면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사례나 피드백이 쌓이니 유치원 담당자는 보호자의 (애정이기도 한) 불안, 그리고 자신의 (책임 관련) 불안을 예술교육가에게 이런저런 말들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나는 ‘다들 예술을 너무 모르는군’이라고만 투덜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안을 찾고 싶었다. 누군가의 불안과 과한 관심이 참여자의 표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을 달래는 장치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단 하루 프로그램이지만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만들어 유치원을 통해 보호자에게 전달했다. 내 아들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 받아오던 안내문의 말투, 분량, 디자인을 참고해서. 아이들은 활동 후 울퉁불퉁하고 비정형적인 작품과 함께 이 안내문을 들고 집에 갔다.
 

 
현대미술이라는 말은 평소에 쓰지도 않지만 이럴 때는 좀 있어 보이기 위한 명분으로 적극 사용했다. 아이들의 작업물이 낯설어 보여도 그것은 오히려 더 현대미술에서 추구하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그러니 이 프로그램을 안심하고 바라봐도 된다고. 심지어 더 애매모호하거나 자유분방한 작업물도 그동안 여러 현장에서 나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음과 같은 사진도 추가했다.


그리고 하단에는 집에서 아이들의 표현을 응원하는 또 다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의미가 있는 경험의 과정을 보호자도 궁금해 할 수 있도록.
이렇게까지 안내하고 설득하며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몇번이고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과정이 관계된 사람들의 심정이나 관점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로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의 의미나 속성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도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때 내가 무엇을 해보는냐 일뿐.
그리고 다른 대상, 다른 주제의 프로젝트나 활동 과정에서 역시나 다수의 불안을 달래는 안내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예술에 대한, 그것에 비용이나 시간을 들이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심지어 예술을 다루는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작동하는.
그때마다 필요한 것이 언제나 안내문 같은 것만은 아니다. 어떤 때에는 다른 형태를 빌려 설득이나 공감을 해야 하고 어떤 때에는 기싸움을 해야 하고 어떤 때에는 정중한 거절이나 무대응이 나를 살리기도 한다. 안내문은 너무 친절한 선택 같기도 한데 나에게 현재 중요한 것은 상황을 해결하는 것 이전에 나도 그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보며 나아가는 것이다.
여전히 설득과 설명을 이어가는 요즘, 문득 6년 전 유치원에 보냈던 안내문이 떠올라 지나온 경험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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