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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면 읽히겠지

[쓰다 보면 읽히겠지] 22. 수신자 없는 제안서를 써야 할 때

by 문화예술기획 최선영 2025. 10. 3.
<쓰다 보면 읽히겠지> 
 
나는 혼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문화, 예술 관련 공공 프로젝트나 사업 기획을 하기도 한다. 창작, 기획, 문화예술교육 등을 주제로 강의나 컨설팅을 하기도 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과 마주 앉아 회의도 많이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나 강아지들과의 산책 길에 여러 생각을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과 상상과 심정을 가로지른다. 나는 그 흐름을 글로 옮겨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 문화예술 분야의 질문이 특정 사업이나 제도, 이슈에 대한 한정된 논의로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의 삶은 여러 차원으로 연결, 교차되기 때문이다. 웹진이나 자료집 원고, 사업 보고서에는 담기 애매하지만 분명하게 떠오르는 현재의 질문을 계속 펼치고 싶다.

 
 
 
 

쓰다 보면 읽히겠지 22.

"수신자 없는 제안서를 써야 할 때"

 
 

'프로그램은 우다다다 달려가지만'이라는 제목의 문화예술교육 연수를 우다다다 마무리하며 가을을 시작하고 있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딴짓을 해보자는 워크숍도 열었는데 정작 딴짓하기엔 빈틈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길게 뻗어 누운 연휴가 반갑고 달다. 
여름부터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다녔다. 예술가, 기획자, 행정가, 활동가, 연구자 등. 희망이나 기대보다는 어려움과 불만을 훨씬 더 많이 들었는데 오래전부터 들었던 말들 같았다. 코로나가 닥치고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기후위기가 체감된다고 새로운 질문이 시작된 것 같지만 질문의 출발점도 뻗어나가는 이유도 흥미롭게 기억되지는 않는다. 그건 무엇 때문일까.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의 관점이 제자리를 맴돌아서일까. 혹은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범위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도 그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온 건 최근이다. 그래서 내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면 다른 영역으로 활동의 범위를 바꾸거나 확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기웃거리기라도.
2년 전, 독립출판이지만 처음으로 책을 썼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영역이나 분야를 향해 이야기를 발신해야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책 덕분에 지역 이주, 자녀 교육, 인권, 심리 미술, 특수 교육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기획자의 성장 기록과 예술교육에 대한 강의 노트가 왜 그러한 영역과 연결되는지 신기하기도, 의아하기도 했다. 어쨌든 문화, 예술 분야의 지원사업을 어떻게 개선할지, 사업 안에서 어떤 창작을 할지, 기획서를 어떻게 쓸지, 예술의 의미를 어떻게 정책 안에서 설득할지, 공공 영역의 예술교육 사례를 어떤 언어로 기록할지 이외의 질문을 만났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 확장, 활동 범위의 경계 넘기가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예술교육의 가치를 세련된 말과 제스처로 표현하는 유명인들이 문화예술교육 영역에 등장하거나, 기획과 브랜딩의 노하우를 강조하는 강연자들이 공공기관 연수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의 가치 판단 이전에 어떤 변화가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문화, 예술 영역으로 이렇게 넘어오고 기웃거리고 있는데, 그것에 거리낌도 없는데 이 영역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실험하거나 발언하기 위해 어디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저기까지 가볼까, 저기에서는 어떤 방식의 표현 언어가 필요할까, 그것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런 궁금함이 시대적 태도로서 필요할 수도 있을 텐데. 사회적으로 공표된 당면 과제는 아니지만 어떤 변화가 감지될 때 ('우리'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나는 다른 움직임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수신자 없는 제안서를 써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포트폴리오나 이력서를 잘 정리해서 다시 문화, 예술 분야의 다른 활동 기회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식의 기록과 언어를 다듬어 어디로 뻗어나갈지 일단 멀리 던져봐야 할 것 같다. 그 시작이 책이었는데 독립출판을 하다 보니 한계도 있었다. 그래서 더 본격적인 시도가 필요해 보인다. 요새 여러 지원사업 모니터링 후 보고서에 누군가의 활동에 대해 '무엇이 필요해 보인다'는 표현을 많이 썼는데 그 누구보다 나에게 다른 시도가 '필요해 보인다'.
이런 긴 말들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다른 재미를 만들고 싶다'. 주어진 범위, 예측 가능한 이야기 속에서는 살아있는 무언가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소소한 기쁨, 잔잔한 감동, 미세한 떨림도 좋긴 한데 그것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서로 공감하는 분위기만 지속되면 재미는 없다. 사건이 필요하다. 어렵고 희미한데 저 멀리를 향해서 눈을 부릅뜨니 좀 달리고 싶은 마음도 일렁인다. 가장 바쁜 10월에.
 
 

*2025-2026년에 쓴 글 중 일부와, 새롭게 쓴 글을 모아 책을 발간했다.
[책] 기획자의 노트 <쓰다 보면 읽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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