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다 보면 읽히겠지> 나는 혼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문화, 예술 관련 공공 프로젝트나 사업 기획을 하기도 한다. 창작, 기획, 문화예술교육 등을 주제로 강의나 컨설팅을 하기도 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과 마주 앉아 회의도 많이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나 강아지들과의 산책 길에 여러 생각을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과 상상과 심정을 가로지른다. 나는 그 흐름을 글로 옮겨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 문화예술 분야의 질문이 특정 사업이나 제도, 이슈에 대한 한정된 논의로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의 삶은 여러 차원으로 연결, 교차되기 때문이다. 웹진이나 자료집 원고, 사업 보고서에는 담기 애매하지만 분명하게 떠오르는 현재의 질문을 계속 펼치고 싶다. |
쓰다 보면 읽히겠지 32.
“나뭇가지 토크"
여름에 무섭게 자라던 마당 나무들은 늦가을부터 잠잠해졌다. 약을 치지 않아 구멍이 숭숭 났던 나뭇잎들은 찬바람에 힘없이 떨어져 마당 주변을 메웠다. 바쁘게 바쁘게 한 해를 보내는 사이 마당은 파릇파릇했다가 쨍했다가 고즈넉했다가 부스스하게 되었다. 나는 다시 파릇파릇해질 시기를 기다리며 다음 해의 작업을 상상하거나 준비하곤 했는데 2025년 12월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마당 곳곳에서 햇볕과 비와 강아지들의 오줌을 먹고 자란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매년 눈이 먼저 가는 대상이 바뀌는데 올해는 가을에 가지치기해 둔 나뭇가지 더미까지 눈에 들어왔다.



참 많기도 했다. 적당히 잘라 정리를 할까, 그런 생각도 잠시, 자른 나뭇가지들을 천천히 깎고 싶어졌다. 나뭇가지마다 색깔, 질감, 두께, 무게, 냄새도 다 다를텐데 하나씩 만지며 껍질을 벗기듯 칼질을 하다 보면 10년 전쯤 방석을 70개 짜서 마지막 개인전을 했던 것처럼 묘한 기운과 재미가 생겨날 것 같았다. 아무튼 특별한 이유나 의도 없이 '하고 싶어서' 나뭇가지를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만들겠다는 목적도 없었다. 그보다는 '깎는다'를 계속하고 싶었다. 마당 가득 재료가 쌓여있고 겨울 가득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나뭇가지 깎기를 한 달 넘게 지속했다. 하루에 2-3시간씩 거의 매일 노래를 듣거나 부르며 나뭇가지를 깎았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엄지 손가락 지문도 사라졌다. 더 많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추운 날 마당에서 나뭇가지 더미를 정리하고 흩날리는 낙엽을 주워 모았다. 춥고 심심한 날들이 잘도 흘러갔다. 감나무, 모과나무, 태산목 중에 모과나무가 제일 잘 깎인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한참 '깎는다'의 시간이 지나니 뽀얗게 속살을 드러낸 나뭇가지가 바구니에 가득 담겼다. 한 개씩 보면 투박했지만, 여러개를 넓게 펼쳐두면 따뜻한 느낌마저 들었다. 문득, 나는 그 감각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졌다. 그럴만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계획에 없던 '나뭇가지 토크'를 기획했다. SNS에 토크 소식을 알렸다. 오래오래 천천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긁어모아 토크 주제로 함께 소개했다.
나뭇가지 토크
마당에서 가지치기한 나무들을 한가득 깎았습니다.
사람들과 둘러앉아
나뭇가지를 만지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겨울이 적당히 끝날 듯합니다.
여러 계절을 단단하게 보낸 나뭇가지에 기대어
현재를 나눌 누군가를 만나고자 합니다.
*진행 : 최선영(문화예술기획자)
*신청대상 : 3인 이상 모인 경우 누구나 신청 가능
*일정과 장소 : 2-3월 중 신청인과 협의 후 결정
*진행 방식 : 저를 초대해 주시면 나뭇가지를 한 다발 들고 갑니다. 나뭇가지를 만지며 2-3시간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나뭇가지를 깎지는 않습니다. 빔프로젝터나 노트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참여 비용 : 별도 비용은 필요하지 않고 푸짐한 다과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청 방법 : voslss@hanmail.net 으로 참여 인원, 신청 이유, 장소(지역), 원하는 토크 주제 등을 자세히 보내주세요.
*토크 가능 주제
(중복 선택 가능, 그 외 주제 제안도 환영!)
1. 예술계 진입하기 대신 예술‘도’ 하며 살아가기
2. 이제 시작만 하면 되는 '기록하기'
3. 무리하며 사는 것의 가치와 재미
4. 불안과 욕망 사이에서 해보는 선택들
5. 돈? 그동안의 고생과 앞으로의 고생
6. 안 되는 걸 알면서 꿈꾸는 습관 들이기
7. 문화예술교육, 경험적 근거로부터
8. 예술에 대한 불안을 달래는 언어들
9. 어려움과 헤맴이 만들어내는 지속 가능성
10. 가끔 서울을 여행하며 지역에서 산다는 것
생각보다 빨리 다양한 사람들이 토크를 신청했고 총 다섯 번의 토크를 진행했다. 운전면허가 없는 나는 큰 캐리어에 나뭇가지를 가득 넣고 충청도, 강원도, 서울, 경기도 등을 오가며 사람들을 만났다. 예술가, 예술교육가, 기획자 등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여러 토크 주제를 골랐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결국 개인의 어려움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 나뭇가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우리에겐 잠시 기대어 이야기할 나뭇가지, 시간, 장소, 사람 혹은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뭇가지를 선택해 깎은 이유'에 대해 특별히 묻고 답하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럴 틈도 없이 누군가는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늘어놨고, 누군가는 나뭇가지를 쌓았고, 누군가는 나뭇가지로 본인의 등을 두드렸고, 누군가는 입술 위에 나뭇가지를 올리며 묘기를 부렸다. 그러는 사이 각자의 이야기가 쏟아졌고 흘러갔다. 귤도 까먹고 초콜릿도 나눠 먹었다. 추운 겨울이 사람, 사람, 사람의 이야기로 조금씩 깎여 허옇고도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나의 마당에, 누군가의 미래에, 어쩌면 각자의 복에. 그것은 내가 나뭇가지를 깎기 시작할 때,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캐리어를 끄는 관광객들 사이를 걸으며 '내 가방 속에만 나뭇가지가 가득 들어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신이 나기도 했다. 어느 시절에는 ‘내 삶에만 조금 다른 것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좀 외롭기도 했지만.
도시의 딱딱한 모서리에 치여 캐리어 속 나뭇가지가 한두 개쯤은 부러질 수도 있겠지. 그러면 또 마당에서 킁킁거리며 강아지 오줌이 묻지 않은 나뭇가지를 몇 개 주우면 되겠지. 혹은 익숙한 길가에서 적당한 크기의 다음 복을 줍거나. 모을수록 가벼워지는. 깎을수록 커지는. 나도 알 수 없는 또 다른 사건을 향해.













*2025-2026년에 쓴 글 중 일부와, 새롭게 쓴 글을 모아 책을 발간했다.
[책] 기획자의 노트 <쓰다 보면 읽히겠지>
https://uugoorichoi.tistory.com/158
[책] 기획자의 노트 <쓰다 보면 읽히겠지>
기획자의 노트쓰다 보면 읽히겠지 문화, 예술 분야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는 기획자가 있다. 그는 삶과 충돌하는 예술을 자주 경험하며 할 말이 많아졌다. 그래서 긴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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