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다 보면 읽히겠지> 나는 혼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문화, 예술 관련 공공 프로젝트나 사업 기획을 하기도 한다. 창작, 기획, 문화예술교육 등을 주제로 강의나 컨설팅을 하기도 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과 마주 앉아 회의도 많이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나 강아지들과의 산책 길에 여러 생각을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과 상상과 심정을 가로지른다. 나는 그 흐름을 글로 옮겨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 문화예술 분야의 질문이 특정 사업이나 제도, 이슈에 대한 한정된 논의로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의 삶은 여러 차원으로 연결, 교차되기 때문이다. 웹진이나 자료집 원고, 사업 보고서에는 담기 애매하지만 분명하게 떠오르는 현재의 질문을 계속 펼치고 싶다. |
쓰다 보면 읽히겠지 30.
“속도의 차이를 펼쳐서"
여러 명이 동시에 참여하는 예술 활동을 기획하다 보면 주로 시간을 기준으로 타임테이블을 짜듯이 활동을 계획하게 된다. 5분 동안 동시에 무언가를 하고 20분 동안에 메인 활동을 하고 그다음에 또 다 같이 무언가를 하고. 하지만 실제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시작하고 마무리하며 다음 활동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각자 속도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차이에 집중하기보다 계획 대로 속도를 맞추는 소수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전체 진행을 하게 되곤 한다. 그러다 보면 나는 사람들을 한 명씩 들여다보지 못하고 인솔자, 진행자 정도가 되어 “자, 다음!”, “또 다음!”을 마음속으로 외치며 미션을 수행하듯 시간을 쫓아간다.
이런 경우가 너무 많았는데 그때는 나의 마음 상태가 다급했던 것 같다. 개별 프로젝트에서 무난하거나 매끄러운 진행이 성과로서 중요했던 시기랄까.
그런데 2019년, 30년 넘게 수도권에서 살다가 지역 소도시로 이주한 후 먼 산과 넓은 하늘도 자주 보고 마당에서 천천히 나무 타는 냄새도 맡으며 사는 날이 많아지니 시간이 넓게 펼쳐진 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경쟁하듯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시간 대신 잡초 가득한 골목길을 천천히 걷는 시간이 많아진 덕분도 있을 것이다. 문서 파일을 열어서 시간 순서에 따라 할 일을 빽빽이 써도 한편으로는 ‘이건 문서고 현장은 다른 속도로 흘러갈 거야, 그래도 되지, 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구체적인 감각으로 연결된 계기가 있었는데 2023년에 집 마당에서 덜 거대하게 <복많 비엔날레>라는 걸 열었던 순간이었다. 공식적인 사업이나 프로젝트는 전혀 아니었고 넓어진 마당에 신이 난 나와 남편이 앞뒤 생각 안 하고 오로지 재미만을 쫓으며 기획했던 일이었다. 우리 집 장수견 ‘복많이’의 이름을 따서.
예술계에서 ‘비엔날레’라는 커다란 이름이 주는 의미와 아우라가 있지만 <복많 비엔날레>는 그야말로 복이 넘치는 비엔날레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굳이 이 모든 것을 예술이라고 힘주어 주장할 생각은 없었지만, 삶을 바탕으로 예술도 하고 기획도 하는 우리의 이모저모를 드러내 응원받고 싶기도 했다.
어쨌든 그때 마당 곳곳에 그동안 나와 남편이 만든 창작물이나 놀잇감을 설치해 두고 3일 동안 사람들을 초대했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마당과 집을 오픈해 두었는데 하루에 스무 명쯤 비엔날레를 찾아왔고 각자만의 속도로 무언가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근데 이때 문득 이런 방식으로 여러 활동을 기획하거나 운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길게 시간을 열어두고 사람들이 자신의 속도와 관심사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하도록.

그렇다고 내가 안 바쁜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이런 진행 방식도 낯설어하진 않는지 살펴야 하고, 다양한 표현 방식을 자세히 관찰해야 하고, 너무 복잡하거나 접근이 어려운 활동이 배치된 것은 아닌지 예상밖 반응도 파악해야 했다. 오히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현장에서 설치물이나 동선을 재빠르게 변경해야 했기에 하루 종일 상황 전반을 신경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개별적 선택 중심으로 현장이 굴러가니 누가 너무 느리거나 급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한 가지 설치물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들여다보며 긴 시간 탐색을 했고 어떤 사람은 이쪽에서 10분, 저쪽에서 5분 자신이 끌리는 대로 빠르게 이것저것을 즐겼다. 오히려 각자의 욕구가 더 자연스럽게 채워져서 내가 애써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내를 하거나 동기부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구경만 하겠다고 했는데 그 역시도 다양한 참여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후에 미술관에서 가족 대상 예술 놀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는데 <복많 비엔날레>를 떠올리며 미술관에서 처음 제안한 시간보다 더 길게 총 4시간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그리고 3개의 공간에 여러 놀이들을 배치하고 가족들이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활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복많 비엔날레>에서 누군가 놀다가 잠시 쉬다가 다시 놀았던 것처럼 그러한 참여 방식도 가능하다고 적극 안내했다. 시간에 참여자의 속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속도를 기준으로 선택의 범위를 열어둔 것이다. 그것은 노는 사람,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것을 찾으려는 사람을 가까이서 지켜본 결과 얻게 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후 여러 활동에서 나는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 흐름과 분위기에 나도 더 익숙해지고 있다. 누군가는 매우 천천히 천천히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예측하게 되었다. 그래서 참여하는 사람을 다그치는 일도 많이 줄었다. 각자의 속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불안을 내비치는 대신 서로의 불안을 줄일 수 있는 다른 환경을 만들어보며. 역시 기존 틀 안에 무언가를 많이 넣으려고 할 때보다 그 틀 자체를 해체하려고 할 때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아이디어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질문과 관찰이다.
*2025-2026년에 쓴 글 중 일부와, 새롭게 쓴 글을 모아 책을 발간했다.
[책] 기획자의 노트 <쓰다 보면 읽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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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기획자의 노트 <쓰다 보면 읽히겠지>
기획자의 노트쓰다 보면 읽히겠지 문화, 예술 분야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는 기획자가 있다. 그는 삶과 충돌하는 예술을 자주 경험하며 할 말이 많아졌다. 그래서 긴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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